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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시인의 마을

껍데기로 가득 찬 반도, 제발 가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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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데기는 가라/신동엽/1967년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지난 3일 개성공단에 체류중이던 7명의 남측 관계자들이 전원 귀환하면서 2003년 착공한 지 10년만에 가동이 완전히 중단됐다. 남쪽 입주 기업들의 경제적 손실과 개성 공단에 근무했던 북쪽 5만 여 노동자들의 생활고는 물론이거니와 남북 대결의 완충지대 역할을 했던 개성 공단의 폐쇄는 한반도가 언제든 화약고가 될 수 있는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제 취임 후 첫 미국 순방중인 박근혜 대통령이 뉴욕 지역 동포 간담회에서 우리 경제가 북한의 위협 정도로는 흔들리지 않는다며 동요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지만 매도 맞은 데 또 맞으면 더 아픈 법이다. 어느 국가가 불안이 상존해 있는 국가와 마음놓고 거래를 하겠는가.

 

개성 공단의 실질적인 폐쇄는 이명박 정부 이후 줄곧 추진해왔던 적대적 대북정책의 결과물이다. 그토록 고대했던 남북정상회담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남북은 극단적인 대치 국면에 들어섰고 급기야 개성 공단 폐쇄라는 예측 불가능의 위기 국면을 만들고 만 것이다. 어느 한 쪽의 잘잘못을 따지기에는 남과 북 정치 지도자들의 현실 인식이 여전히 냉전체제에 갇혀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생존을 위한 엑소더스 행렬이 줄을 잇고 있지만 국제사회를 향해 어깃장만 놓고 있는 북쪽의 지도자는 혈기왕성한 젊음을 엉뚱한 곳에 소비하고 있고, 압도적인 경제적 우위와 한층 성숙된 시민의식을 바탕으로 북쪽을 포용했으면 좋으련만 남쪽의 지도자는 여전히 반공 이데올로기의 장막에 갇혀 살고 있는 게 현실이다. 4.19혁명의 완성이 아사달 아사녀의 부끄러운 맞절이어야 한다는 시인의 바램은 자꾸 시간만 거꾸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내 정치로 시선을 돌려보면 더 한심하기 짝이 없다. 서구 사회가 수백 년의 피와 눈물로 이룬 민주주의를 불과 반백 년만에 이룩했다는 자부심 이면에는 부끄러운 자화상만 가득하다. 노동자들은 생존을 위해 저 높은 크레인을 올라야만 하고, 하루가 멀다하고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속출하니 가히 자살공화국이 따로 없다. 적자생존의 한국식 교육은 학교폭력을 낳고, 생활임금에도 턱없이 모자라는 최저임금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 수백 만이다. 종북이니 좌파로 매도 당하는 복지로 인해 힘겹게 황혼을 걷는 노인들이 부지기수다. 이런 상황에 관심을 갖는 정치 지도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지도자의 기본 자질인 도덕적, 윤리적 기준은 날이 갈수록 바닥을 향해 추락하고 있고, 승리한 정당의 정치인은 표를 얻기 위한 공약이었다며 너무도 당당하게 공약 수정을 만천하에 공포한다. 패자는 패배의 원인이 장년층 이상의 유권자들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다며 중도성 강화를 부르짖고 있지만 사실은 보수화의 길을 가겠다는 말이다. 젊은 층의 울며 겨자먹기식 지지를 맹목적 지지로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차라리 승자와 한 배를 타는 게 낫지 않을까. 게다가 진보라는 정치인들은 대중들은 이해하기도 힘든 노선 투쟁으로 이합집산만 반복하고 있으니 진보=서민이라는 등식도 이제는 옛말이다. 정치 지도자들이 그들만의 리그를 즐기고 있는 사이 서민들의 삶은 더이상 떨어질 나락도 없다.

 

대륙의 한 귀퉁이에 힘겹게 붙어있는 한반도에는 온통 껍데기만 널부러져 있다. 껍데기만 가득하니 바스락바스락 소리만 요란할 뿐이다. 껍데기는 제발 가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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