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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열여덟 살 소년 제화공의 죽음과 천하무적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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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무적/김남일/1991년

 

19대 대통령 선거일이 50일 앞으로 다가오면서 투표시간 연장이 주요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각 후보 진영간 정치공학적 이해타산으로 시작됐지만 사실은 훨씬 이전부터 국민들이 요구해온 주장이기도 하다. 현행 투표시간은 민주주의의 원칙 중 하나인 국민 참정권을 침해한다는 것이다. 투표시간 연장을 두고 각 후보 진영은 극명한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는 모양이다. 통합민주당 문재인 후보측과 무소속 안철수 후보측은 투표시간 연장에 찬성하는 반면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측은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특히 지난달 30일 박근혜 후보는 '100만 정보방송통신인과 함께 하는 박근혜 후보 초청 간담회'가 끝난 뒤 기자들과 만나 투표일을 공휴일로 지정한 데가 우리나라밖에 없으며 투표시간을 늘리는 데 100억원 정도가 들어가는데 그럴 가치가 있냐며 반대 의견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박근혜 후보의 '투표일이 공휴일인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는 이날 발언은 사실과 다른 것으로 밝혀졌다. 유럽의 많은 국가들이 투표 참여율을 높이기 위해 일요일 투표를 원칙으로 하고 있고 우리나라와 같이 평일에 투표하는 호주와 필리핀도 투표일이 공휴일이라는 지적이 잇따라 제기되고 있다. 어쨌든 많은 국민들이 투표에 참여할 수 있도록 다양한 제도적 개선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곳이 정치를 논하는 자리가 아니기에 투표시간 연장에 관한 내용은 이쯤에서 접기로 한다. 다만 '투표일이 공휴일인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는 박근혜 후보의 왜곡발언 보도를 보며 과연 집권 여당 대통령 후보라는 사람이 우리나라의 노동현실을 제대로 알고나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투표일이 공휴일이라고 해서 쉬는 노동자가 얼마나 되며, 팍팍한 삶 때문에 잔업이며, 연장이며, 특근을 밥먹듯이 하는 노동현실을 알고는 있는지 의심스럽다. 투표시간 연장이 대선 쟁점으로 부각된 이유도 우리나라의 이런 왜곡된 노동현실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는지, 정치에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하루하루 버텨내기 위해 투표장보다는 일터로 가야만 하는 노동자들의 현실을 제대로 알고나 있느냐 말이다.

 

이야기가 잠시 삼천포로 빠졌지만 오늘 살펴볼 김남일의 <천하무적>이 바로 우리나라 노동현실을 목도한 어느 지식인의 어떻게 살것인가에 관한 고민을 담고 있는 소설이다. 제목이기도 한 '천하무적'은 특정인의 물리적 힘을 상징하는 위엄성이 아니라 삶의 방식, 삶의 태도에 관한 다분히 추상적이고 은유적인 표현이다. 소설가인 주인공이 추구하는 '천하무적의 길'은 특별한 사건을 계기로 극적 반전을 이룬다. 그렇다면 '천하무적'이 내포하고 있는 삶의 태도는 어떤 것일까.  

 

 

천하무적: 나도 이제 늙었다는 것이다.

 

소설은 '우주의 끝은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어린 시절 밤하늘을 보면서 품었던 질문들이 어느 순간에서부터 더이상 떠올리지도, 그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을 우습게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의식변화의 시작은 '나도 이제 늙었다'는 자조에서 비롯된다. 열정이나 진보보다는 안정적인 삶을 희구하는 가장 보편적인 삶의 태도일 것이다. 아무개 시인이 술자리에서 했다는 "내가 마흔다섯 살이나 처먹어버렸네"라는 말은 주인공 '나'의 탄식을 대변해 준다. '천하무적'은 세속의 때가 묻은 '마흔다섯 살이나 처먹어버린' 세대가 소망하는 가장 일반적인 삶의 태도는 아닐까. 그렇다면 삶의 태도로써 '천하무적'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 주인공은 국가와 체제의 안녕과 질서를 현저히 위태롭게 했다는 혐의 때문에 징역을 살고있는 선배의 편지 속에서 '천하무적의 길'을 발견하게 된다.

 

벗들! 세 번째의 징역살이가 두 달이 넘어 어언 세 달로 접어들었다…벗들! 그리고 나는 노자(老子)를 만났다……벗들! 그렇듯 개뼈다귀 같은 화두(話頭)를 눈병처럼 찾아온 노자가 풀어준 것이다……벗들! 안심하시라. 나는 천하무적의 길로 가려 한다. 다시 만나는 날까지 잘 먹고 잘 살자. 잘 있어라. -<천하무적> 중에서-

 

노자(老子)가 등장해서 머리가 지끈거릴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그리 거창한 철학적 담론은 아니지 싶다. 노자 하면 쉽게 연상되는 삶을 달관하는 태도, 어떤 외압이나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운 삶, '천하무적의 길'이란 바로 안정적인 일상을 추구하는 보통의 중장년층이 생각하는 삶의 방식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주인공 '나'는 무심한 나날의 한 부분을 쪼개어 선배 면회라도 가는 것을 '기왕에 연을 맺은 자들의 도리라기보다는 훗날 저자(저잣거리)에서 있게 될 그와의 재회를 염두에 둔 체면치레'쯤으로 격하시키고 있다.

 

한편 '천하무적'은 1980년와는 분명히 달라진 1990년대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목표의식의 상실 즉 80년대를 휩쓸었던 민주, 노동, 통일 등의 담론들이 6월항쟁을 계기로 일정 부분 성과를 거둠으로써 90년대의 담론은 급격하게 일상으로 옮겨가게 된다. 열정이라곤 빛바랜 사진 속의 풍경들처럼 가물가물해진 시대가 90년대를 살았던 이들의 아니 21세기인 오늘까지도 이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삶의 본질, 역사의 본질은 그대로 80년대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렇게 부유하는 삶은 구자혁이라는 열여덟살 짜리 소년 제화공을 만나면서 세상의 본질에 대한 또는 삶의 태도에 대한 의식의 전환을 맞게 된다. 이 때까지 '천하무적'이 주어진 현실에 안주하는 현실적이고 타협적인 삶의 태도였다면 이 후의 '천하무적'은 타인과의 부대낌이 없이는 결코 가치있는 길이 아님을 깨닫는다.


천하무적 :목숨의 무게보다 더 무거운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소설의 대부분을 장식하고 있는 구자혁의 삶은 80년대 열악한 노동현실을 투영한다. 그렇다면 '나'로 하여금 어린 구자혁에 대한 연민을 '20세기의 마지막 고빗길을 허적허적 힘겹게 기어오르는 나에 대한 연민'임을 깨닫게 했던 여덟살 소년 제화공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3년 동안 해소병을 앓다 죽은 아버지가 남긴 빚 때문에 도저히 버틸 수 없었던 구자혁은 어머니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던 큰 형이 제대를 며칠 앞두고 트럭에 깔려 팔 하나를 잃어 영농후계자의 꿈이 산산히 깨진데 이어 대처로 나가 소식이 끊겼던 작은형마저 조폭이 되어 텔레비전 화면에 등장하는 상황에서 어머니가 작은형의 면회를 다녀온 날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서울에 올라온 구자혁은 목욕탕과 성남 족쟁이 골목을 전전하며 작은 희망이나마 보듬고 살지만 어느날 밀링에 손가락을 다쳐 치료비 몇 푼 받고 해고를 당한다. 복직을 위해 노동조합 조합원들과 함께 싸워보지만 돌아오는 건 무자비한 폭력 뿐이었다. 이에 앙심을 품고 구두공장에 몰래 숨어들어가 불을 놓다가 사장에게 들키기도 했다.

 

'나'는 이런 구자혁같은 인물들을 등장시켜 소설을 준비하고 있다. 그런 연으로 만난 구자혁이지만 이미 열정을 잃어버린 '나'에게 열악한 노동현실이란 끈질기게 물고 늘어질만큼 한가한 삶도 아니었다. 결국 몇 번의 만남만으로 구자혁과의 인연을 끊게 된다. 

 

그런 세상은 그런 일들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질 만큼 한가하지(?) 않았고, 나 역시 그런 분위기에 난 아니다 할 만큼 여유 있는 편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간 내가 써온 소설에 대한 내 자신의 평가는 날로 위축되어가는 운동권 전체의 사정과 맞물려서 최악의 진단도 서슴지 않았다. 그리하여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도박에서 아쉽지만 그만 손을 떼는 편이 정직한 게 아닌가 하는, 그래서 오히려 진지해지는 열정과 나의 능력 사이에서 쉴 새 없이 방황하고 있었다. -<천하무적> 중에서-

 

그러던 어느날 '나'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된다. 구자혁이 자취방에서 연탄가스에 중독돼서 죽었다는 것이다. 열여덟살 소년 제화공의 죽음으로 '나'는 '선배'가 말했던 '천하무적의 길'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된다. 어쩌면 90년대는 80년대와 다를 것이라는 확신, 분명히 다르기에 되돌아보지 않았던 90년대가 그 이전 시대보다 조금도 진보하지 않았다는 자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우리는 타인의 삶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현실, 타인의 삶을 제쳐두고 나만의 '천하무적'의 삶을 살기에는 너무도 비루한 현실, 그 깨달음은 세상에는 목숨의 무게보다 더 무거운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엇인가, 도대체!

그 무엇이 서울 땅에 발을 디딘 지 왜 1년도 안 되는 기간에 열여덟 살짜리 소년 제화공을 그런 죽음으로 내몰았단 말인가. 도대체, 그 가공할 힘을 지닌 '가치'의 정체는 무엇인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자신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소년, 도대체 그런 게 있는지조차 모르고 살다 죽은 소년 - 그의 죽음에 대해 나는 또 무엇인가. -<천하무적> 중에서-

 

소설은 20세기 마지막 고빗길을 넘어가는 '나'의 심정을 '여름밤은 붉은 십자가와 휘황한 장급 여관 간판들로 더욱 길고 무덥다'는 말로 형상화하고 있다. 90년대는 80년대와 다를 거라는 그래서 '나만의 달관한 삶'인 '천하무적의 길'을 꿈꾸던 주인공에게 열악한 노동현실에서 비롯된 구자혁의 죽음은 다가올 밀레니엄도 막연한 불안일 수밖에 없다. 21세기인 오늘까지도 세계 최장 노동시간을 자랑하는(?)는 노동현실이지만 공휴일 하루 추가한다면 생산성이 어쩌니 하고 반대부터 하고 나서는 자본의 세상에서 '천하무적'의 길은 당신과 내가 서 있는 이 곳의 가치보다 결코 앞설 수 없을 것이다. 여전히 끈끈한 연대가 필요한 시대이다. 무릇 달라졌다고 보이지만 본질은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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