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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민초들의 희망을 허무주의적 시선으로 그려야만 했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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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평역/임철우/1983년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그믐처럼 몇은 졸고/몇은 감기에 쿨럭이고/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침묵해야 한다는 것을/모두들 알고 있었다/오래 앓은 기침소리와/쓴 약 같은 입술댐배 연기 속에서/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그래 지금은 모두들/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자정 넘으면/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

 

임철우의 소설 <사평역>은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를 소설화한 것이다. 시와 소설을 다 읽어본 독자라면 배경이나 문장의 어조는 물론 전체적인 분위기까지 유사하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소설이 시의 응축된 언어를 풀어헤쳐 놓았는지, 시가 소설의 서사적 문장들을 간결하고 정제된 언어로 함축시켜 놓았는지 마음 한 구석을 짠하게 만든다. 굳이 같은 소재의 두 문학 장르의 차이를 얘기하자면 시 '사평역에서'가 보통 사람들의 삶에 대한 애틋함과 작은 희망을 노래한다면 소설 <사평역>은 고단한 서민들의 삶을 허무주의적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1980년대라는 암흑의 시대를 톱밥난로처럼 작고 희미한 희망에 기대어 살았던 민중들을 바라보는 짠한 시선은 2012년 초겨울 바람만큼이나 스산하기만 하다.

 

저자는 왜 힘없이 순진하게만 살아가는 민초들에게 희망을 얘기해 주지 못했을까. 이들을 바라보는 저자의 따뜻한 시선이 결국 허무주의적 결론으로 치달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압제와 억압의 사슬에서 하나 둘 쓰러져갔던 동료들에 대한 저자의 속깊은 속죄의식이 느껴진다. 지금은 화물열차만 다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간이역인 남평역이 실제 배경이라는 소설 <사평역>에서 '사평역'은 눈과 귀를 봉쇄당해 언어의 유희마저 잊어버린 민초들이 더불어 언어적 감각을 찾는 곳이기도 하고,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는 희망의 기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시선이 허무주의적 희망으로  전락해 버린 데는 역장의 시선으로 묘사된 간이역 풍경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철길은 훨씬 앞당겨져서 끝나 있다. 수은등 불빛이 약해지는 부분에서부터 차츰 희미해져 가다가 이윽고 흐물흐물 녹아버렸는가 싶게 철길은 더 이상 볼 수가 없다. 그 저편은 칠흑같은 어둠이다. 어둠에 삼켜져 버린 철길의 끝이 오늘 밤은 까닭없이 늙은 역장의 가슴 한구석을 썰렁하게 만든다. -<서평역> 중에서-

 

비루한 현실만큼이나 예측불가능한 미래에의 삶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철길과도 같다. 폭압적인 통치로 신체의 자유는 물론 양심의 자유마저 억압받는 현실은 그야말로 칠흑같은 어둠이다. 도도히 흐르는 강물처럼 지평선 끝까지 뻗어있어야 할 철길이 보이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지만 민초들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에서는 뜨끈뜨끈한 온기가 느껴진다. 비록 겨울밤 찬공기를 어둠침침한 간이역 톱밥난로에 의지해 옹기종기 모여있지만 말이다. 이런 작은 희망의 불씨마저 없다면 암흑의 시대를 온전히 버텨낼 수 없는 사람들이다.

 

지금 서평역에는 한시간 째 완행열차를 기다리고 있는 다섯 사람과 뒤이어 시린 바깥바람을 싣고 온 네 명의 여자까지 모두 아홉 사람이 막차를 기다리고 있다. 여기에 톱밥난로의 불이 꺼질까 노심초사하는 역장까지 열 명이 보기 드물게 이 조그만 산골 간이역을 채우고 있다. 병든 노인과 농부인 아들, 학생운동으로 제적당한 듯 보이는 청년, 교도소에서 출소한 지 얼마 안된 중년의 사내, 몸집이 큰 중년 여자, 바바리코트를 입은 창년 춘심이, 큼직한 보따리를 이고 온 행상꾼 아낙네들 그리고 톱밥난로에서 멀찍이 떨어져 죽은 듯 잠만 자고 있는 미친여자까지. 이들의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간이역에 모여들었다. 하지만 이들이 가야 할 곳은 뚜렷해 보이지 않는다. 그저 완행열차라도 타야만 하는 사람들이다. 

 

한 곳에 정을 주고 정착하기에는 이들의 삶은 너무도 많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누군가가 "산다는 게 대체 뭣이간디……" 하고 내뱉은 말에 저마다 도대체 산다는 게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그러나 이들에게 산다는 것에 대한 질문은 세상과 개인간의 불일치만을 확인해 줄 뿐이다. 저자의 따뜻한 시선이 허무주의적으로 점점 변해가는 것은 이들의 실낱같은 희망에 힘이 되어주기에는 너무도 버거운 자신의 비루한 현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농부의 생각엔 삶이란 그저 누가 뭐래도 흙과 일뿐이다. 계절도 없이 쳇바퀴로 이어지는 노동. 농한기라는 겨울철마저도 융자금 상환과 농약값이며 비료값으로부터 시작하여 중학교에 보낸 큰아들놈의 학비에 이르기까지 이런저런 걱정만 하다가 보내고 마는 한숨 철이 되고 만 지도 오래였다. 삶이란 필시 등뼈가 휘도록 일하고 근심하다가 끝내는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이리라고 여겨졌으므로, 드디어 어려운 문제를 풀어냈다는 듯이 농부는 한숨을 길게 내쉰다. -<사평역> 중에서-

 

드디어 두 시간을 연착한 후에야 야간 완행열차가 도착하고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승객들은 반가움보다는 차라리 피곤함과 허탈감에 젖은 모습으로 열차에 올라탄다. 저자는 위태롭게 난간 손잡이를 잡고 있는 청년의 모습을 통해 뭔가 불길한 암시를 주기도 한다. 이 불길한 암시는 톱밥난로의 열기만큼이나 보잘 것 없는 희망마저 온전히 담아낼 수 없게 만드는 세상에 대한 항변인지도 모른다. 

 

얼핏, 누군가가 아직 들어가지 않고 열차 난간에 기대어 서 있는 게 보였다. 역장은 그 사람이 재 너머 오 씨 큰아들임을 알았다. 고개를 반쯤 숙인 채 난간 손잡이에 위태로운 자세로 기대어 있는 청년의 모습이 역장은 왠지 마음에 걸렸다. 이내 열차는 어둠 속으로 길게 기적을 남기며 사라져버렸다. -<서평역> 중에서-

 

저자의 따뜻한(?) 허무주의적 시선은 마지막 열차가 떠난 후 톱밥난로 근처 의자로 옮겨 여전히 잠에 빠져있는 미친 여자를 통해 극적으로 표현된다. 민초들을 공포에 떨게 하고 민초들의 삶을 철저하게 파괴해 버리고 결국에는 미치게 만드는 국가권력의 폭력성을 미친 여자를 통해 우회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민초들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난로에 톱밥을 더 부어줘야겠다고 생각하는 역장이 보여주는 희망 때문이다. 더불어 사는 연대의 희망이랄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사평역에서 두 시간을 기다려 탔던 야간 완행열차의 종착지는 어디였을까 하는 것 말이다. 어쩌면 이들을 태운 완행열차가 힘겹게 도착한 곳은 2012년 초겨울의 이곳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또 이들이 타게 될 첫 차는 ○○발 KTX이길 간절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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