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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국가폭력을 대하는 두 작가의 같은 듯 다른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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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우의 <아버지의 땅>(1984년)과 이창동의 <소지>(1985년)

반값등록금 집회에서 야당 최고위원이 테러를 당했다. 평범한 우리네 이웃처럼 보이던 한 중년의 여성은 '김대중 노무현 앞잡이'니 '빨갱이'니 하면서 집회현장에 뛰어들어 정동영 최고위원의 머리채를 잡아흔들었다. 비단 정동영 최고위원만이 아니다. 최근들어 진보인사들에 대한 백색테러가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다. 이 중년 여성에게 21세기는 여전히 '빨갱이' 소탕에 혈안이 된 반세기 전의 그 날에 불과했던 것일까? 분노보다는 연민과 안스러움이 앞서는 이유는 누가 그녀를 과거 속 악몽에 내던졌나 하는 것이다. 게다가 백주대낮에 야당 지도자를 상대로 자행된 테러에 대해 일종의 해프닝으로 치부해 버리는 경찰을 보면서 또다른 형태의 국가폭력을 보는 것 같아 답답할 뿐이다. 여전히 부실하기는 하지만 제도적으로 규제된 국가폭력을 요즘은 일부 단체나 개인이 대행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번 사건처럼 폭력은 대개 물리적으로 가해지는 압박이나 상해를 의미한다. 그러나 폭력은 늘 물리적인 압박과 동시에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상해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무엇보다도 국가폭력은 광범위한 대중을 상대로 하기 때문에 어떤 형태의 폭력보다도 더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한국 현대사에서 반공 이데올로기는 국가폭력을 조장하고 심화시켜왔던 가장 큰 원인 제공자였다고 할 수 있다. 다음 두 소설은 반공 이데올로기에서 비롯된 국가폭력을 고발하고 있다. 임철우와 이창동. 이 두 작가의 공통점이라고 하면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큰 변혁의 전환점이 되었던 한국전쟁과 광주항쟁을 소설의 주요 소재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도 임철우의 <아버지의 땅>과 이창동의 <소지>는 반공 이데올로기를 명분으로 자행되고 있는 국가폭력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이념대립 때문에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가족의 의미를 되살리고자 한다. 아픈 가족사를 통해 현대사의 비극을 재조명하고 비극의 악순환을 끊고자 하는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소설들이다.   

세대에 걸쳐 자행되는 폭력

두 소설에서 아버지는 사회주의자로 등장하고 한국전쟁과 함께 행방불명이 된다. 그러나 아버지의 그림자는 세월의 굴곡을 넘어 길게 드리워져 있다. 체제와 이념의 반역자인 아버지에 대한 폭력은 아버지 세대에서 끝나지 않고 오롯이 대물림된다. 국가의 직접적인 폭력이건 국가의 조장하에 이루어지는 사회적 차별이라는 형태의 폭력이건 아버지의 어두운 그림자는 가족들을 짙게 드리우고 있다.

임철우의 <아버지의 땅>에서는 이런 국가폭력에 대해 상징 기법을 통해 한 발 비켜선 듯 하지만 고통의 강도는  한층 더 뼈저리게 다가온다. '빨갱이' 아버지 때문에 겪어야만 했던 주인공 나와 어머니의 고통은 흉조로 인식되는 까마귀나 어릴 적 보았던 마루 밑 심연을 통해 형상화된다. 나에게는 재수없는 까마귀이지만 어머니에게 새는 아버지에 대한 기다림이다. 또 마루 밑 까마득한 어둠은 아버지로 인해 받아왔던 두려움을 상징한다. 

마루 밑 깊숙한 저편엔 언제나 까마득한 어둠이 도사리고 있었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괴괴한 어둠과 그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솔솔 풍겨 나오는 음습한 곰팡이 냄새는 마치 은밀한 범죄 장면을 숨어 지켜보고 있는 듯한 은근하면서도 유혹적인 두려움과 함께 전신에 아릿한 쾌감과 흥분을 불러일으키곤 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땅> 중에서-

반면 이창동의 <소지>에서는 국가폭력이 좀 더 구체화된다.  말단 공무원인 큰 아들. 소위 연좌제의 고통을 온몸으로 체감하면서 살고 있다. 그는 기억 속에서 아버지를 지우고 싶어한다. 그는 '빨갱이' 아버지 때문에 사관학교에 떨어져야 했고 대학도 포기해야 했다. 공무원인 그가 승진하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존재를 부정해야만 한다. 한편 아버지를 닮았다는 둘째 아들. 그는 사회변혁을 꿈꾸는 활동가이지만 어머니는 그를 통해 아버지를 본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행방불명 되고 몇 달 후 남편을 만나게 해주겠다는 낯선 남자를 따라갔다가 강간을 당하고 낳은 자식이 둘째 아들이다. 아버지로 인해 뒤틀릴대로 뒤틀려버린 가족사를 형상화하고 있지만 사실은 저자가 바라보는 현대사의 비극이다. 

끝나지 않은 폭력, 그 희망과 좌절

두 저자에게 현대사의 비극은 또는 세대간에 걸쳐 자행되고 있는 국가폭력은 미래로 전진하기 위해서 반드시 청산해 할 잘못된 과거의 악습이다. 반세기에 걸쳐 꼬여버린 매듭을 풀기 위한 두 저자의 희망은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절절한 희망인 동시에 현실적으로 실현불가능한 좌절이다.

<아버지의 땅>에서는 기동훈련을 대비한 야전 진지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유골에서 철사줄을 해체하는 과정과 어딘가에 묻혀있을지도 모르는 아버지의 땅에 내리는 눈으로 형상화된다. 유골에서 철사줄을 해체하는 과정은 이데올로기를 극복하고 가장으로서의 아버지를 부활시키는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세상의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눈은 아버지와 남겨진 가족들을 옥죄고 있는 반공 이데올로기를 지우는역할을 한다. 

한편 <소지>에서는 제목 그대로 종이를 태우는 의식으로 현대사의 아픔을 극복하고자 한다. 종이는 다름아닌 아버지를 닮은 둘째 아들이 항상 지니고 다니던 이념 관련 유인물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아버지가 행방불명되던 그 때부터 어머니를 짓누르고 있던 치통으로부터의 해방은 또 다른 여운을 남겨준다. 치통, 슬픈 가족사와 아픈 현대사는 이빨을 뽑아준 손자에게로 전이된 것은 아닐까. 저자는 이빨을 뽑았다고 해서 당장 아물지 않은 상처가 손자대(代)에서는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다분히 현실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여전히 좌절된 현실, 그 현실이 오래가지 않기를 바라는 작은 희망일 것이다.

"식아. 니도 소원 있으모 빌어라. 지금 소원을 말하모 무신 소원이래도 다 들어주신대이."
알아들었는지 어쨌는지 아이는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얼굴로 잠자코 불길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 어미가 돌아오기를 빌기라도 하는 것일까. 입술을 꼭 다물고 있는 아이의 두 눈이 불빛을 담아 이글거렸고 그녀는 아이를 와락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소지> 중에서-

분명한 것은 두 저자 모두 가족사로 상징되는 현대사의 아픔들이 어떻게든 치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일부 보수단체 회원들의 테러나 교과서에 민주주의 대신 자유 민주주의를 표기해야 한다는 국방부의 주장을 보면 반세기 넘게 지속돼온 소모적 이념논쟁이 봄눈 녹듯 사라지지만은 않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가해진 국가폭력도 특정 단체나 개인을 내세워 더 교묘한 형태로 변화해 갈지도 모르겠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다양성이다. 민주주의의 다양성은 모든 것을 아우르는 포괄적인 의미다. 결코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로 축소될 수 없는 게 바로 민주주의의 진짜 얼굴이다. 나의 가치관과 상대의 가치관이 공존하는 사회가 민주주의다. 서로의 가치관을 인정하지 못하고 폭력으로 억누르고자 한다면 그들이 그렇게 비난하는 저 북쪽의 봉건 군주국가와 다를 게 뭐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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