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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북 리뷰

위대한 이야기꾼, 레테의 강을 건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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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의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제1권/2000년

이런 걸 우연의 일치라고 해야할까? 우연의 일치치곤 안타까움이 너무도 컸다. 버스로 출퇴근하는 나는 출근 때마다 꼭 챙기는 게 하나 있다. 직장까지는 버스로 40분에서 길게는 1시간까지 걸리는 거리라 책 한 권 챙기는 일이 출근준비의 전부가 된지 오래다.

그날은 그동안 바진의 [가(家)]1,2권을 다 읽고 무슨 책을 챙길까 고민하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1]를 선택했다. 10년 가까운 시간을 내 책장에 머물면서도 먼지가 쌓이지 않은 몇 안되는 책 중의 하나가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시리즈다. 이유는 간단하다. 고전 읽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고전읽기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특히 서양고전문학을 즐겨읽는 독자들에게 그리스 신화 관련 도서는 필독서 중의 필독서일 것이다. 그리스 신화를 알지 못하고는 서양고전문학에 등장하는 다양한 비유적 표현들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플라톤의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고 숨을 거두기 마지막으로 했던 말 "크리톤, 나는 아스클레오피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네"라고 했다는데 그리스 신화를 읽어보지 못한 독자들은 이 대목에서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머리를 긁적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대사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쉽지만 답을 주기는 어려울 것 같다. 궁금하다면 그리스 신화를 직접 읽어보기 바란다.

그렇게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챙기고 잠깐 인터넷을 접속했는데 부음 관련 뉴스가 눈에 들어왔다. 이윤기 선생이 심장마비로 별세했다는 기사였다. 가방에 챙겨두었던 그 책을 다시 꺼내어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이윤기 선생의 또다른 신화 이야기를 기대하고 있었는데....나는 그를 '위대한 이야기꾼'이라고 부른다. 단순한 신화 전달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의 신화 이야기에는 또 다른 이야기들이 열매처럼 주렁주렁 달려있다. 그의 입담을 통해 신화는 우리 삶 깊숙한 곳까지 파고도는 자리를 잡게 된다. 우리 부모님들이 화롯가에서 할머니에게 듣던 옛날 옛적 이야기들이 있는 풍경을 오늘날 책으로 되살린 이가 이윤기 선생이라면 내가 그를 너무 과소평가한 것일까?

아무튼 토마스 불핀치가 문학과 구전으로 내려오던 그리스 로마 신화를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한 이후 수많은 관련 도서들이 번역되고 창작되었지만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만큼 쉽고 재미있게 풀어낸 그리스 로마 신화는 없었다. 아마 내 남은 삶 동안 이런 역작을 만나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수많은 독자들의 아쉬움 속에 레테의 강을 건넌 이윤기 선생의 명복을 빈다.

이윤기 선생의 그리스 로마 신화 시리즈 중 첫번째 책인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1]의 부제는 <신화를 이해하는 12가지 열쇠>다. 부제가 말해주듯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1]은 그리스 신화 읽기에 입문하는 초보 독자들에게 신화 여행의 팁을 제공해 주고 있다. 인간의 뇌용량을 초과할만큼 헤아리기 힘든 수많은 신들이 존재하는 신들의 세계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길라잡이가 바로 이 책 시리즈 1권이다.

머리말에서 밝혔듯이 미궁으로 들어간 테세우스를 구한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처럼 선뜻 접근하기 어려운 신화의 세계라지만 탐험을 시작하는 독자들에게는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와 같은 상상력이 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신화라는 미궁에 들어온 독자들에게 상상력을 자극해주는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1]은 1세대 그리스 신들(으뜸신)이 신화의 주무대인 올림포스산을 점령한 사건을 시작으로 버금신과 딸림신들의 이야기다. 즉 그리스 신화의 가계도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정리해 주고 있다. 또 으뜸신과 버금신, 딸림신들의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신화 읽기의 재미를 한껏 고조시켜 준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21세기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도 수천년 전부터 회자되었던 신화의 틀 속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신화를 읽어야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언어, 생활습관 등이 신화를 떼어버리곤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아! 그렇구나' 하면서 고개를 연신 끄덕이게 될 것이다.

신발, 나무, 뱀, 죽음 등과 관련된 신화들을 12개의 주제별로 묶어 풀어쓴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1]을 펼쳐든 순간 신화읽기의 새로운 재미에 뉙스가 물러나고 헤메라가 다가오는 것조차 모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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