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에 한번은 독일을 만나라/박성숙/21세기북스/2012년
사업차 뉴질랜드로 출장을 간 적이 있다. 출장 일정을 끝내고 귀국하기 전날 저녁 현지 거래처 사장의 저녁식사 초대를 받았다. 남태평양의 밤바다가 한 눈에 보이는 오클랜드 항구의 어느 레스토랑. 그곳에서 우리 일행은 생애 가장 지루한(?) 저녁식사를 했다. 기껏해야 십 분이면 끝날 식사를 장장 두 시간에 걸쳐 하고 있었으니 들쑤시는 엉덩이를 주체하지 못해 오클랜드 밤바다를 핑계로 들락날락 했던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민망하기 짝이 없다. 제 아무리 민감한 혀라도 뉴질랜드의 생선 요리와 와인 맛을 제대로 느꼈을 리 만무했다. 지금 다시 그날로 돌아간다면 진득하니 앉아서 미식가 흉내라도 내볼 텐데 말이다.
일생에 한번은 독일을 만나라
몇 달 후 뉴질랜드 거래처 일행이 한국을 찾았고 우리는 복수 아닌 복수(?)를 하고 말았다. 짧은 저녁식사에 이 차 삼 차로 이어지는 술 접대. 그들의 눈꺼풀은 중력을 이기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고, 연신 쏟아지는 하품에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다른 이유로 그들의 엉덩이도 그 때 우리처럼 안절부절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당신들도 한국에 왔으니 한국 문화 좀 배우고 가쇼.' 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일생에 한번은 독일을 만나라/박성숙/21세기북스/2012년 |
<일생에 한번은 독일을 만나라>는 필자가 출장 당시 경험했던 국가 사이의 문화적 차이가 소소한 일상을 관통해 사회적 가치와 역사까지 아우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생에 한번은 독일을 만나라>에는 한국인들의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독일인들의 생각과 삶과 문화가 있다. 저자의 이민 경험을 바탕으로 독일의 지리, 문화, 역사 등을 꼼꼼히 기록해 독일 여행의 길라잡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특히 관광지의 피상적 서술에 그친 보통의 여행서와 달리 이방인의 눈에 비친 독일인의 일상과 생각, 가치까지도 놓치지 않는 저자의 세심함을 엿볼 수 있다. 책은 독일을 북부와 중부, 남부로 구분하고 여기에 구동독 지역을 추가해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아시아의 이방인이었던 저자가 독일 문화에 적응해 가면서 느낀 한국과 독일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디지털 한국’과 ‘아날로그 독일’이라는 말로 한국과 독일 문화의 차이를 간단명료하게 짚어준다.
디지털이 온통 점령한 한국에 비해 독일은 불편한 아날로그의 세상이 여전히 존재하는 땅이다. 독일에 사는 동안은 느끼지 못하다가도 한국만 가면 독일이라는 나라는 변화에 너무 둔하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갈 때마다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는 한국은 볼수록 낯설고 눈이 휘둥그레지곤 한다. -<일생에 한번은 독일을 만나라> 중에서-
얼핏 들으면 한국이 독일보다 현대사회에 더 빨리 적응해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자의 독일 여행기를 덮는 순간 이 말의 참뜻은 전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즉 우리사회가 급속히 변화해 가는 현대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또는 잊혀진 가치에 대한 회한 내지는 자기반성을 압축한 표현으로 해석이 가능해진다. 그렇다. 여행이란 다양한 문화의 ‘다름’을 확인하고 인정하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나를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여행이 나그네에게 주는 덤이라고나 할까.
▲휴양지의 저녁 시간도 도시와 마찬가지로 조용하다 |
아날로그 독일에는 있고 디지털 한국에는 없는 것
한때 ‘8282’라는 전화번호가 유행한 적이 있다. 물론 지금도 신속성을 요하는 업체의 전화번호에는 어김없이 ‘빨리빨리8282’가 들어간다. 급속하게 변화해 가는 시대에 시의적절하게 적응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지만 지금의 한국사회를 만든 몸에 밴 생활수칙이자 IT강국이라는 명예를 준 가치이기도 하다. 문제는 반 세기를 넘기면서까지 체화된 ‘빨리빨리’ 문화가 좀처럼 여유로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룸에 도착하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모습은 스페인, 이탈리아 같은 지중해 나라들과는 다른 조용하고 깨끗하게 잘 정돈된 피서지였다.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 역시 들뜨지도, 흐트러지지도 않은 단정한 모습이 시내에서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휴가지에 도착하면 긴장부터 풀어지면서 시작되는 일탈이 그곳에서는 왠지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일생에 한번은 독일을 만나라> 중에서-
과거에야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치지만 지금은? ‘빨리빨리’ 문화가 낳은 각종 부실의 결과는 차치하고라도 화려해진 겉모습에 비해 그 속은 여전히 벼랑 끝에서 생존을 갈구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현실 때문이리라. 경제 규모는 비대해지고 있지만 삶의 질을 가늠하는 각종 제도와 시스템은 아직도 산업화 시대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사회의 자화상은 독일인들의 ‘여유’와 묘한 대조를 이룬다. 단 며칠간의 휴가를 통해 일상의 비루함과 고단함을 보상받으려는 우리네 모습 말이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쾰르너 돔이 반세기가 넘게 보수공사 중이라니 우리로서는 가히 상상할 수 없는 나태함(?)이다.
▲지은 지 100년 된 슈투트가르트 역 정비 프로젝트는 시민들의 반대로 계속해서 난항을 겪고 있다 |
디지털 한국과 아날로그 독일의 ‘다름’은 환경파괴를 이유로 슈투트가르트 역 정비 프로젝트슈에 반대하는 한 어린이의 편지에 대한 답장 형식으로 슈스터 시장이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소개한 대목에서는 그야말로 감동이다. 사회적 합의. 권력을 가진 세력의 일방적 독주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익숙하지만 낯선 단어인지도 모르겠다.
“공원의 나무를 걱정하는 여러분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 나무들은 우리 시의 공기를 시원하고 깨끗하게 정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나무들을 희생시키면서 새로운 역사를 짓는다는 것은 당연히 잘못된 결정입니다. 그러나 슈투트가르트와 전 유럽을 달리는 기차가 좀 더 빠르고 편안하게 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이 일을 흔쾌히 결정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나도 슐로스가르텐의 초원을 사랑합니다.” -<일생에 한번은 독일을 만나라> 중에서-
우리는 이미 이명박 정부 시절 사회적 합의 대신 독단과 독선으로 진행시킨 4대강 사업이 심각한 후유증을 낳고 있는 현실을 목도하고 있다. 앞으로 어떤 자연적 재앙이 닥칠지 또 재앙을 막기 위해 얼마의 돈이 들지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여기에 권력자의 독선으로 야기된 사회분열을 치유하기 위해 얼마나 큰 사회적 비용을 치러야 할지를 상상한다면 토론과 설득과 양보의 사회적 합의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최근의 NLL논쟁도 마찬가지다. 여야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과정은 생략된 채 보수는 진보를 공격하는 종북 프레임에 갇혀 진실을 보고도 외면하고 심지어 진실을 왜곡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다. 다수의 국민은 아니라고 하는데 말이다. 비단 보수뿐만 아니다. 진보도 사회적 합의의 과정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매 한가지다.
마지막으로 잘못된 과거를 숨김없이 고백하고 그런 과거를 통해 배우려는 독일인들의 자세는 부러움과 동시에 부끄러움을 주기에 충분하다. 우리처럼 냉전의 시대를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의 창시자인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생가를 보존해 이데올로기를 떠나 사회변혁을 향한 그들의 열정을 배운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가히 상상하기 힘든 현실이다. 특히 전세계를 살육의 장으로 몰아넣었던 나치의 만행과 그에 동조했던 자신들의 과거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어린 아이들에게도 가감없이 가르친다는 것은 독일이 전쟁의 참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대국의 반열에 올라있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나치가 유대인들에게 저지른 만행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나치에게 박해 받은 동성애자들을 위한 추모비까지 있다니 충격 그 자체다.
▲베를린 중심 공원인 티어가르텐에 있는 '나치에 의해 박해당한 동성애자를 위한 추모비(아래). 추모비 안에는 가슴 아픈 동성애를 그린 짧은 영상물이 반복적으로 상영되고 있다(위) |
두 청년이 포옹하며 입을 맞추는 장면이었다. 시대를 상징하듯 한 사람은 군복을 입고 있었고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었다. 몇 분 동안의 짧은 영상물이지만 너무 진지하고 아파 보이는 그들의 사랑이 좁은 추모비의 창을 통해 가슴을 울리며 전달되었다. 독일이라는 나라의 수도, 베를린의 심장부,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든 시민들이 지나다니는 공원에서 하루 종일 돌아가고 있는 이 필름은 과연 내게 무엇을 전하려는 것일까.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함께 갔던 우리 아이들이 창에 머리를 들이미는 순간 나도 모르게 움찔하며 밀쳐내고 말았다. 결국 당시 겨우 5학년이었던 작은아이까지 보고야 말았지만, 내게는 아직도 받아들이기 힘든 이질적인 문화임이 분명했다. -<일생에 한번은 독일을 만나라> 중에서-
해방된 지 60년이 훌쩍 넘었지만 일본 제국주의 강점기를 찬양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비록 소수일지언정 권력을 지탱하는 한 축이라는 사실은 아직까지도 역사왜곡을 서슴지 않는 일본 우익을 비난하기에 민망할 정도로 부끄러운 우리사회의 자화상이다.
저자는 독일 주택가를 거닐면 지루하지 않다고 한다. 집집에 나 있는 창문마다 볼거리를 제공해주기 때문에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단다. 특이한 것은 인형부터 갖가지 수공예품, 비싼 화분, 화려한 모빌 등등이 집 안에서 제일 고급스럽고 깔끔한 장식품은 죄다 나와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집 안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밖을 향하고 있다. 왜 독일인들은 인형을 밖을 향해 진열하는 걸까. 정답은 예쁜 인형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고 싶어서란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독일인들의 이런 행동이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겠다. 저자가 겪어본 독일인들은 얼핏 보기에는 남들을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남에게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여행이란 나와 타인 사이의 ‘다름’을 발견하는 과정이고 그런 ‘다름’을 있는 그대로 보아주고 때로는 나를 돌이켜보고 나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자랑하기 위해 인형을 밖을 향해 진열하는 것을 두고 ‘허영심 많은 독일인’이라는 섣부른 편견을 가질 수도 있지만 저자는 그들을 겪어봤기에 우리가 알고 있던 독일인과 또 다른 그들의 성향이나 성정을 알게 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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