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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북 리뷰

김춘추, 난세의 영웅인가 역사의 죄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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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추, 대왕의 꿈/신재하·조정우/아름다운날/2012년

 

민족[nation, 民族]은 언어와 종교, 세계관, 생활양식 등 문화적 공통성을 비탕으로 하여 전통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다. 인종이 신체적 특징을 기준으로 한다면 민족은 문화적 공통성을 기준으로 한다는 점에서 인종보다는 더 세분화된 인간 분류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은 문화를 형성하는 세부 기준에 따라 또 다양하게 분류되기도 한다. 한편 학자에 따라서는 민족을 문화 공동체가 아닌 정치 공동체로 보는 시각도 있다. 민족의 개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주장이 있지만 민족이라는 개념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1789년 프랑스 혁명을 기준으로 한 근대 이후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필자가 느닷없이 민족의 개념을 언급하는 데는 한 편의 소설 때문이다. 삼국통일의 영웅, 김춘추를 다룬 역사소설 <김춘추, 대왕의 꿈>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의 일대기를 통해 분분하게 언급되는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재조명하는 데 있다. 김춘추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중간이 없을 정도로 극단적이다. 즉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을 통일한 영웅에서부터 이 땅에 외세를 끌어들인 극단적 사대주의자까지 시대에 따라 그를 평가하는 시선도 변화무쌍한 게 사실이다. 저자는 이런 김춘추에 대한 평가를 오로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민족이라는 개념의 형성시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김춘추의 시호는 무열이며 묘호는 태종으로 태종 무열왕(太宗 武烈王) 대신 '김춘추'라는 그의 이름이 더 익숙할 정도로 자주 오르내리는 것도 김춘추 개인의 평가에 대한 호불호가 극명하기 때문일 것이다. 김춘추는 신라 제25대왕 진지왕의 손자다. 어머니는 신라 제26대왕인 진평왕의 딸인 천명부인으로 전왕인 진덕여왕의 조카인 셈이다. 김춘추는654년 진덕여왕이 죽자 상대등 알천 등의 추천으로 왕위에 올라 신라 최초의 진골 출신 왕이기도 했다. 김춘추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으니 삼국통일의 또 다른 영웅 김유신이다. 정치적 동반자라는 것 말고도 두 사람은 처남과 매제 사이기도 하다. 김춘추의 부인이 김유신의 동생인 문명부인 문희이기 때문이다.

 

소설 <김춘추, 대왕의 꿈>은 일연의 <삼국유사>에 전하는 김춘추와 문희의 러브 스토리로 시작한다. 소설은 철저하게 역사적 고증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소설적 상상을 가미해 인간 김춘추를 해부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한 개인의 사랑을 둘러싼 고뇌에서부터 때로는 정치적 선택을 해야만 했던 한 영웅의 번민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을 재조명하면서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있어서는 사뭇 단호한 입장을 견지하기도 한다.

 

김춘추가 훗날 외세를 끌어들인 단초가 되었던 문희와의 러브스토리는 대강 이렇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서로의 집을 자주 왕래할만큼 요즘으로 치면 절친이었다. 김유신에게는 두 동생이 있었는데 보희와 문희로 김춘추는 언니인 보희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사랑의 운명은 언니 보희의 꿈을 비단치마를 주고 산 동생 문희에게로 향해 있었다. 김춘추와 문희의 사랑은 김유신의 철저한 계략(?)에 의해 진행되었다. 이런 경우를 두고 '영웅은 영웅을 알아본다'고 하는 것일까.

 

김유신의 철저한 계산된 음모에 의해 김춘추와 문희는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 여기까지가 <삼국유사> '김춘추'편에 나오는 역사지만 소설은 <화랑세기>에 나오는 '김춘추'편을 덧붙여 보다 드라마틱한 러브스토리를 전개시킨다. 즉 김춘추는 원래 화랑도의 상선인 보종의 딸 보라와 결혼한 사이였다. 물론 김춘추와 문희를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전처인 보라가 이미 죽고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의 동생인 보량이 김춘추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김춘추는 문희와의 결혼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보량의 시기와 질투 속에 김춘추와 문희는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고 전처인 보라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고타소에 대한 짠한 마음은 깊어만 가는데 대야성 전투에서 백제군에 의해 딸과 사위인 품석을 잃으면서 아들과 사위의 복수를 위해 고구려와 연합을 시도하고 결국에는 중국의 당까지 끌어들이는 역사적 과오(?)를 범하고 만다. 역사의 기록이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김춘추의 역사적 평가 이면에 가족사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기까지 하다.

소설은 이제 김춘추의 정치적 선택에 대한 번뇌로 전개된다. 여기서 앞서 언급한 '민족'의 개념이 당시에도 있었느냐에 따라 김춘추의 평가는 극과 극으로 흘러가게 된다. 하지만 소설은 당시에도 민족의 개념이 있었다는 전제 하에 전개된다. 당나라와의 굴욕외교를 맺어야만 하는 상황에서 김유신과 김춘추의 대화를 통해 또 김춘추의 유언을 통해 당시에도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동일 뿌리에서 나왔다는 인식이 있었다는 데 촛점을 맞추고 있다. 

 

"요동을 비롯한 고구려 영토는 치우천황 이래 수천 년을 이어온 우리 삼한의 땅으로, 우리 신라가 진정한 삼한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려면 마땅히 요동을 비롯한 고구려의 전토를 손에 넣어야 할 것이오. 당이 고구려를 멸하면 필시 고구려의 영토를 침탈하려 할 터이니, 국력을 기울여 삼한의 영토를 지켜야 할 것이오. 만약 삼한의 영토를 지키지 못한다면 무슨 면목으로 조상들을 대할 수 있겠소?……무도하기 그지없는 당나라 군사를 우리 삼한 땅에 끌어들인 내가 죽어서 저승에 간들 우리의 후손들을 어찌 대할 수 있겠소. 공께서 반드시 영토를 정복하여 통일을 이루시어 삼한의 조상들께 누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여 주시오. 부탁하오." -<김춘추, 대왕의 꿈> 중에서-

 

저자의 아니면 독자들의 돌이킬 수 없는 지나간 과거에 대한 아쉬움을 소설의 세계에 담아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당시에도 약한 수준의 민족 개념이 있어 김춘추의 고뇌가 사실이었는지 누구도 알 수 없다. 반면교사인 치욕의 역사를 통해 아픈 과거를 반복하지 않도록 현실을 다지고 미래를 설계할 뿐이다. 

 

한편 김춘추의 평가에 대해 <삼국통일의 정치학>이라는 책에서는 그가 반민족 행위자도 사대주의자도 아니라고 말한다. 좀 더 정확히 하면 김춘추의 나·당 연합이 그렇다는 것이다. 즉 19세기 비스마르크의 독일 통일도 애초에 민족적 통일이 목표가 아니었고 안보에 위협이 되는 요소들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얻은 부산물이었듯이 삼국통일도 민족주의의 관점이 아닌 국제정치학적 관점에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진보적 시각에서도 민족주의는 그리 가치를 두는 부분이 아니다. 하기야 다문화 시대 민족주의는 자칫 분열과 반목의 원인 제공을 할 수도 있으니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창궐했던 제국주의의 침략 과정에서 '민족'의 개념은 약소국들이 독립의지를 갖고 투쟁하게 했던 동력이었다는 사실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소설 <김춘추, 대왕의 꿈>은 전개도 빠를 뿐더러 철저한 역사적 고증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다양한 인물과 사건들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역사 소설을 읽는 어려움은 어느 정도 해소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란 말이 있듯이 역사적 고증은 때로 승자에 의한 왜곡의 역사가 되기도 한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고구려와 백제 관련 서술에서는 철저하게 신라적 입장이기 때문에 김춘추가 민족적 고뇌를 하는 설정이 조금은 퇴색되기도 한다. 좀 더 철저한 고증을 아니면 작가의 상상력이 좀 더 동원됐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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