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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전성시대가 없었던 영자의 전성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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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자의 전성시대/조선작/1973년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최근 영국에서는 비싼 등록금 때문에 성매매에 나선 여대생들이 급증하고 있다는 해외토픽을 본 적이 있다. 덧붙여 영국뿐만 아니라 많은 전세계 젊은이들이 생활고로 인해 섹스산업과 관련된 일에 내몰리고 있다고 한다. 이런 일들이 남 일 같지 않다고 느낀 건 비단 필자의 생각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열정적으로 미래를 준비해야 할 젊은이들이 등록금에 발목이 잡히고 생활고를 이기기 위해 옷을 벗어야 하는 현실은 우리나라에서 뉴스 가치가 없어진 지 이미 오래 되었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은 일자리가 없어 방황하고 중년들은 언제 직장에서 쫓겨날지 전전긍긍하고 노인들은 폐지라도 주워야지 생활이 가능한 나라. 소비는 해마다 줄어든다는데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는 나라. 생활임금에 턱없이 모자라는 최저임금으로 근근이 목숨만 부지해가는 가정이 우후죽순 늘어나는 나라. 21세기 대한민국 '영자'들은 그렇게 화려한 거리를 방황하고 삶의 마지막 나락으로 여겼던 음침한 곳에서 웃음을 팔고 있다. 도대체 누구를 탓해야 하는 것일까. 영화 포스터 속 영자의 더없이 행복해 보이는 표정은 삶의 무게를 견디려는 마지막 발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영자에게는 전성시대가 없었다

 

작가 조선작을 아는 독자가 몇이나 될까. 낯선 이름에도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 하면 대부분 짧은 감탄사와 함께 고개를 끄덕끄덕 할 것이다. 두 번에 걸쳐 영화화된 '영자의 전성시대' 원작 <영자의 전성시대>는 작가 조선작의 대표작이다. 1971년 <지사총>이라는 소설로 문단에 데뷔한 조선작은 훗날 대중소설 작가로 변신하기도 하지만 소외계층의 삶을 통해 당대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한 그의 초기작품들은 여전히 높은 문학적 성과를 이룬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영자의 전성시대>는 작가 조선작의 초기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로 그가 당시 사회를 바라본 독특한 시선을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이름없이 살아온 우리네 어머니의 밝혀진 이름 같기도 하고 늘 살가웠던 이웃집 누나 이름 같기도 한 우리의 영자. 그녀에게도 전성시대가 있었을까. 고작해야 '창녀들의 창녀들에 의한 창녀들을 위한' 오팔팔 공화국을 어슬렁거리는 사내들에게 웃음을 팔고 몸을 팔았던 시간을 '영자의 전성시대'라고 주장한 저자에게서 지독한 역설의 미학이 느껴진다. 게다가 짐승같은 한 사내의 눈물겨운 순애보는 또 어떤가.

 

하기야 팔 한 짝이 없는 창녀 영자가 사내들을 제 방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것만큼 화려한 전성시대가 또 있을까 싶다. 전성시대라면 전성시대였던 그 화려한 날도 주인공 '나'의 헌신적 사랑이 아니었다면 가당키나 한 일이었을까. 자랑스런 월남 용사였던 '나'는 우연히 오팔팔에서 파병되기 전 사랑했던 여인, 영자를 만난다. 얼굴로만 치면야 누구보다 예뻤던 영자였지만 한 쪽 팔이 없는 창녀를 어느 사내놈이 품에 안을 수 있었겠는가. '나'가 일하는 목욕탕에서 한 쪽 팔이 없는 영자의 등을 밀어주는 장면에서는 그누구든 울컥 하고 말 것이다. '나'는 목탕탕 보일러실 창고에서 부서진 의자다리 한 개로 의수를 만들어 영자에게 건네준다. 순진한 우리의 영자는 어린애처럼 좋아한다. 드디어 영자의 전성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걸 달고라면 골목길에 나가 설 수가 있겠어. 누구라도 암, 어떤 싹수없는 자식도 꼼짝없이 속아 넘아가고 말 거야." 영자는 의기양양해서 이렇게 말했다. 영자는 나무팔뚝이 든 소맷자락이 대롱거리는 원피스를 한 팔로 치켜들고 바라보며 또 한 번 깔깔거리고 웃었다. 기뻐하는 영자의 모습을 보자 덩달아 나도 기뻤다. 나는 기쁨과 열적은 표정으로 뒤범벅이 된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머리는 써야 돼." -<영자의 전성시대> 중에서-

 

 

그러나 영자의 화려한 날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그해 겨울 일명 '불도저 작전'. 오팔팔 일대의 사창굴을 완전히 소탕하겠다는 계획이 발표된 것이다. 경찰들의 단속이 전에 없이 심해졌다. 또 무허가 건물을 철거하겠다는 서울특별시장 명의의 계고장도 날아들었다. 오팔팔 창녀들은 도망칠 구멍을 찾지만 골목 입구는 경찰들의 방망이로 완전히 봉쇄되고 말았다. 내가 누군가. 자랑스런 월남 용사가 아닌가. '나'는 마치 전쟁을 치르듯 해서 영자를 구출해 낸다. 그로부터 보름 후 영자는 악질적인 나이롱 여편네에게 맡겨두었던 돈을 찾으러 나섰다가 청량리 일각의 그 사창굴에서 일어난 원인 모를 화재 속에서 불에 타 죽었다.

 

영자는 외뚝팔이었으니까. 불에 그슬려 알아볼 수 없게 되었어도 영자의 시체에는 역시 팔뚝 한 짝이 업었다. 나는 영자의 시체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나는 이를 악물어 울음을 삼켰다. "이 바보야, 누가 너보고 이 불길 속으로 뛰어들랬어, 누가." 그러나 영자는 마치 장난기까지 섞인 말투로 "부은 내가 질렀는걸요" 하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나라도 지금 심정 같아서는 어디라도 한군데 싹 쓸어 불질러버리고 싶었으니까 말이다. -<영자의 전성시대> 중에서-

 

21세기 '영자'들도 전성시대를 꿈꾼다

 

소설 속 영자는 단순히 비루한 삶을 사는 한 여자, 살기위해서는 몸밖에 팔 게 없는 어느 창녀만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근대화와 산업화의 거대한 파도 속에 매몰되어간 다시 민초들의 총칭이 바로 '영자'라고 할 수 있다. 밥을 먹게 해 주었다는 경제개발이 잉태한 사회의 구조적 모순 속에서 고향을 떠난 사람들, 도시 변두리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다 쫓겨난 사람들, 삶의 절박함 때문에 윤리적으로 타락할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 그들이 모두 '영자'였던 것이다.

 

 

저자가 당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지만 국가를 위해 사지로 내몰렸지만 결국 갈 곳이 없어 방황하는 '나'나 살기 위해 윤리적으로 타락할 수밖에 없었던 '영자' 등 개발독재의 가장 기층에 있었던 사람들의 눈으로 당시 사회를 바라본다는 점에서 또 다른 형태의 참여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주인공 영자의 인생행로는 당시 소외계층이 걸었던 전형적인 삶의 방식을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가난한 시골 농삿집에서 태어나 굶기를 밥먹듯 했던 영자가 상경해서 식모살이를 전전하다 버스 안내원을 거쳐 창녀가 되는 과정이 그것이다. 게다가 영자는 버스 안내원을 할 당시 삼륜차에 치여 한 쪽 팔을 잃어버린 장애인이다. 주인공 '나'의 삶의 궤적도 마찬가지다. 월남에 파병되어 무공훈장까지 받았지만 훈장이 취직자리를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국가를 위해 목숨까지 불사했건만 '나'에게 주어진 일은 목욕탕 때밀이가 전부였다. 나락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었던 당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있는 인물들이다.

 

외뚝팔 영자가 의수를 달고 기껏 호객행위하는 모양을 전성시대라고 표현한 저자의 시선에서 기층민중들의 소박한 꿈이 느껴지는 것도 특정 권력에 의해 박제된 구조적 모순이 너무도 견고한 철옹성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당시 영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안타깝게도 영자는 또 다른 영자를 낳으며 21세기 대한민국의 비참한 현실을 대변하고 있다. 어느 순간 철옹성이 무너지는 듯 보였지만 권력의 단맛은 무시로 더 단단한 철옹성을 구축하게끔 하고 있다. 그 때보다 살기 좋아졌다고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계량화된 숫자일 뿐이다. 본질은 변하지 않은 채 겉만 화려하게 장식되고 있는 셈이다. '어디라도 한군데 싹 쓸어 불 질러버리고 싶다'는 주인공 '나'의 마지막 절규는 이 시대 영자들의 분노를 대변해주는지도 모를 일이다.

 

전성시대 같지 않았던 '영자의 전성시대'는 21세기 '영자'들이 단 하루라도 머물고 싶은 꿈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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