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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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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왜 <금수회의록>을 금서로 지정했을까 안국선의 /1908년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나타났던 고전소설과 현대소설의 징검다리 역할을 했던 소설의 한 갈래를 신소설이라고 한다. 김동인의 소설을 근대소설의 시작으로 본다면 신소설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월씬 광범위한 작가와 작품을 포괄한 소설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신소설을 대표하는 작가로는 이인직이 꼽힌다. 그러나 그의 친일행적들이 밝혀지면서 이인직을 신소설 대표작가로 교과서에 올려도 되는지에 대한 논의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하기야 몸만 조선인이었을 뿐 정신은 온통 내지인(일본인)이었으니 그를 한국 문학사의 주연급으로 대우한다는 것도 문학인들에게는 자존심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이유로 최근에는 의 저자 이해조를 신소설 대표작가로 부상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찮은 힘을 얻고 있..
친일파 이인직에게도 남모를 고민이 있었다? 이인직의 /1912년 1909년 도마 안중근 의사가 사살한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이토 히로부미의 추도식에서 추도문을 낭독한 조선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고전소설과 최초 근대소설로 평가받는 이광수의 사이의 문학사적 연결고리리인 신소설의 최고작가로 알려진 이인직이다. 한국 문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이인직이지만 그는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철저한 친일파였다. 그는 세상과의 마지막 이별에서도 일본 종교인 천리교 의식을 따르는 등 영혼까지 일본인이고자 했던 극렬 친일파였다. 친일파의 대명사 이완용의 특사이기도 했던 그는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일본의 조선침략을 정당화하며 1910년 조선에게 경술국치의 치욕을 안겨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조선왕조를 비판했고 당시..
혈의 누, 이인직 그는 뼛속까지 일본인이었다 이인직(1862~1916)의 /「만세보」연재(1906.7.22~10.10) 신소설이라고 하면 20세기 초에 등장한 고대소설과 현대소설의 가교 역할을 했던 소설을 총칭해서 이르는 말이다. 최근에 논란이 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최초의 신소설로 이인직의 [혈의 누]를 꼽고 있다. 그러나 뼛 속까지 일본인이었던 그를 우리는 ‘신소설의 선구자’ 정도로만 알아왔다. 추억해 보건데 최소 고등학교 시절까지 우리는 이인직을 개화사상과 자유연애를 소설로 설파한 위대한 개화사상가로 배워왔다. 어쩌면 해방 65주년을 앞둔 오늘까지 제대로 된 친일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은 가운데 그의 친일행보가 문학사적 업적에 가려져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우리사회가 덮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본인이고자 했던 이인직의 사상이 가장 짙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