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에 해당되는 글 10건

  1. 2014.07.22 루신과 프로스트의 '길'을 통해 본 희망의 본질 (16)

 

고향/루신(魯迅, 1881~1936, 중국)/1921년

 

고향의 이미지는 흡사 어머니를 떠올린다. 생명의 근원이면서 끝없는 회귀 본능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래서 고향은 늘 그립고 애틋하다. 오죽했으면 수구초심(首丘初心)이나 호마망북(胡馬望北)이라는 말까지 생겨났을까? 미물인 여우도 죽을 때면 제 살던 언덕으로 머리를 둔다고 하고, 호나라의 말도 호나라에서 북풍이 불어올 때마다 그리움에 북쪽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하물며 미물인 여우나 말도 이럴진대 사람이야 오죽하겠는가! 평생을 외지에 떠돌다가도 나이가 들고 죽을 때가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것이 인지상정이다. 타향에서 화려한 사후를 맞느니 고향 땅 어딘가에 한 줌의 흙이 되고픈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한편 누구든 태어난 곳이 따로 있지만 누구나 고향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오랫동안 각인된 고향의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뒤로는 뻐꾸기 울어대는 산이 있고 대청마루에서 바라보면 멀지 않은 곳에 송사리떼 노니는 실개천이 있는 곳. 고향은 늘 이런 곳이었고, 이런 곳이어야 했다. 각인된 고향의 이미지가 이렇다 보니 오랫만에 찾아간 고향이 화려하게 변신한 풍경에서는 그동안 품었던 애틋함이 사그러들기도 한다.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도 엄연히 고향이 있지만 섣불리 고향 얘기를 꺼내지 못하는 이유다. 어찌보면 고향은 시대보다 몇 발자국 아니 한참 뒤에서 소걸음으로 쫓아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20세기 중국 문학의 거장이자 <아Q정전>의 저자인 루신은 '아무런 생기도 느껴지지 않는 고향 풍경'에서 쓸쓸함과 허전함을 느껴야만 했다. 

 

아마도 고향이란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원래 모습 그대로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달라 보이는 것. 단지 나의 심정이 허전하고 쓸쓸하기 때문에 고향도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일 뿐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번에 고향과 작별하기 위해 왔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우리 가족이 함께 살던 정든 집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상황이었다. 식구들이 집을 비우고 이사를 가야만 했다. -<고향> 중에서- 

 

▲사진>구글 검색 

 

루신이 말한 고향과의 작별은 물리적 작별임과 동시에 시대의 변화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봉건적 고향과의 단절이기도 했다. 오랫동안 떠나 있다 돌아온 고향이 어릴 적 정답던 그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죽마고우였던 룬투의 비참한 모습에서 루신은 무지와 가난 속에서 쇠락해가는 고향을 보았을 뿐이다.

 

그는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얼굴에는 기쁨과 처량함이 섞인 표정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는 뭐라고 입술을 달싹이긴 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더욱 공손한 태도를 취하더니 이렇게 불렀다.

"나으리!"

나는 오싹 소름이 끼치는 것 같았다. 우리 둘 사이에는 이미 두꺼운 장벽이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 슬퍼해야 할 장벽 말이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고향> 중에서-

 

루신은 아마도 봉건체제와 구시대적 유교의 가치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고향을 통해서 쇠락해 가는 종이 호랑이 중국을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루신은 새 질서를 담아내지 못하고 있는 고향을 보면서 그저 좌절할 수 만은 없었다. 오히려 '희망'이라는 이름의 새 시대에 대한 무한한 갈증을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그 유명한 '길'에 관한 명언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사진>구글 검색

 

나는 생각했다. 희망이란 것은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이나 마찬가지다. 원래 땅 위에는 길이란 게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 -<고향> 중에서-

 

책 좀 읽었다고 자부하는 독자라면 이 대목에서 프로스트(Robert Frost, 1874~1963, 미국)의 시 한 편이 떠오를 것이다. 프로스트는 '가지 않은 길'이란 시에서 이렇게 말했다.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꺽여 내려간 데까지/바라다 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 보았습니다/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습니다/그 길을 걸으므로 해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중략…/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마음을 내려놓고 이야기할 것입니다/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 중에서-

 

희망이 없다고들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뼈가 으스러지도록 일해봐야 늘 제자리다. 팍팍한 삶이 개선되기는커녕 당장 오늘만이라도 벼텨내야 하는 현실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오는 소식이라곤 생을 포기한 사람들의 안타까운 절규뿐이다. 그들의 절박함을 담아내야 할 사회는 또 국가는 들릴 듯 말 듯 사그라드는 메아리쯤으로 치부한다. 부질없는(?) 동병상련만이 그들의 가는 길에 조그만 위로가 되어줄 뿐이다. 내일을 말하고 희망을 얘기하는 것은 이미 사치가 되어 버렸다. 더 이상 희망은 길을 걷다 수도 없이 채이는 돌부리가 아니다. 끊임없이 갈구하고 투쟁해야만 손에 잡히는 것이 희망의 본질이다. 늘 그래 왔지만 여태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루신이 말한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은 프로스트의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과 일맥상통한다. 즉 희망은 만들어가는 것이다. 또 희망은 끊임없는 투쟁과 연대의 산물이다. 길처럼 희망은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없다. 가시밭과 덤불로 뒤덮인 땅을 오래도록 걷고, 누군가와 같이 걸어야 비로소 길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Posted by 사용자 여강여호 트랙백 5 : 댓글 16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addr | edit/del | reply Favicon of https://bonlivre.tistory.com BlogIcon 봉리브르 2014.07.22 10:05 신고

    저희 와할머니는 종종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외갓집쯤은 시골에 있어도 좋지 않느냐고들 하는데,
    발전도 안 되고 고리타분한 시골에 왜 외갓집이 있어야 하느냐구요?
    그저 자신들의 안식처를 생각하고 하는 말인 듯한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고충은 생각해 보았느냐는 것이지요.

    불을 찾아 뛰어드는 나방처럼 성공을 찾아
    도시로 도시로 갔던 사람들은 뒤늦게 고향을 찾지만,
    그 고향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불행은 전혀 생각지 않는
    배부른 소리라는 거였습니다.

    올리신 포스팅과는 좀 다른 의미의 댓글이지만
    고향사람들 힘든 부분도 배려를 해줘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벽을 눕히면 다리가 되고 길이 된다..라는 말도 되새겨봅니다.

  2. addr | edit/del | reply Favicon of https://saenooree.tistory.com BlogIcon 耽讀 2014.07.22 10:09 신고

    희망이란 단어, 모두가 공유할 때 그 사회는 사람다운 사회가 될 것입니다.

  3. addr | edit/del | reply Favicon of https://sensechef.com BlogIcon SenseChef 2014.07.22 10:44 신고

    결국 인생은, 미래는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라 생각 됩니다. 인생에 있어서 사람들이 가지 않았던 길을 가 보고 싶은데 위험성이 높아 주저하는 것이구요. 지금도 앞에 놓여 있는 저의 여러가지 선택에서 어떤 것이 좋은 것인지 고민 되네요.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4. addr | edit/del | reply Favicon of http://www.smpark.kr BlogIcon 풀칠아비 2014.07.22 10:48

    지금 제게 있어 고향은 어떤 존재로 남아있나 생각하게 됩니다.
    또 희망은 끈임없이 갈구하고 투쟁해야 손에 잡히는 것이란 말씀에 씁쓸해지기도 하고요.
    사치이겠지만 그래도 희망의 끈을 꼭 잡으렵니다. ^^

  5. addr | edit/del | reply Favicon of https://2losaria.tistory.com BlogIcon 굄돌* 2014.07.22 11:50 신고

    내가 살던 터전이, 주변 환경이 그대로 있지 않으면
    고향은 이미 사라져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지요.
    저도 그렇네요.
    네 살 때 떠나와 살던 제 2고향도 그렇구요.
    지금 살고 있는 이곳이 오히려 고향스러워질 것 같아요.ㅎ

  6. addr | edit/del | reply Favicon of https://ceo2002.tistory.com BlogIcon 불탄 2014.07.22 13:56 신고

    오늘은 희망이란 주제의 글을 여러 곳에서 보게 되네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희망을 끈을 놓지 않기 않으려 애쓰고 있어요.
    세딸과 함께 힘들고 지치고 어렵겠지만, 끝까지 '희망잡이'를 한 번 해보려고요. 하하... ^^

  7. addr | edit/del | reply Favicon of https://artofdie.tistory.com BlogIcon 탁발 2014.07.22 14:15 신고

    이철수 작가의 판화 길이 생각납니다. 길이 없다고 주저앉을 수 없는 ...

  8. addr | edit/del | reply Favicon of https://oldhotelier.tistory.com BlogIcon 늙은 호텔리어 몽돌 2014.07.22 23:40 신고

    그러고보니 고향이란 때묻지 않던, 걱정없이 행복하기만 했던 시절에 대한 맘 속의 이상향이겠군요..
    요즘 같으면 정말 추잡한 현실을 털고 낙향하고 싶어도,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같이 걸을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군요.

  9. addr | edit/del | reply Favicon of https://ecrivain-inconnu.tistory.com BlogIcon écrivain inconnu 2014.07.23 00:39 신고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네요.
    저 문구들은 유명해 자주 접했는데 책을 읽어보진 못했거든요.
    한 번 읽어봐야겠어요.
    음.. 저도 희망을 놓지 않고 길을 뚫어 하나하나 만들어 나가야겠습니다.

  10. addr | edit/del | reply Favicon of https://doitnow61.tistory.com BlogIcon 늙은도령 2014.07.23 03:48 신고

    루신과 프로스트, 그리고 길...
    저는 가끔 거꾸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탄생이 아니라 죽음에서 출발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거울신경을 가지고 있어서 얼마든지 가능하지요.
    그러면 하루하루가 너무나 소중해집니다.
    최근에 스피노자 연구가 활발한 것도 이 때문이지요.

  11. addr | edit/del | reply Favicon of https://hsk0504.tistory.com BlogIcon 한석규 2014.07.23 04:38 신고

    할아버지댁이 시골집에 있어서 예전에 시골에서 많이 놀아서 그런지 시골에만 가면 고향같다는 푸근한 느낌이 드네요^^
    나중에 아들 다 키우고 귀농도 하고 샆다는 생각도 듭니다.
    잘 보고 갑니다^^

  12. addr | edit/del | reply Favicon of https://www.thepatioyujin.com BlogIcon Yujin Hwang 2014.07.23 08:53 신고

    요즘 뷰구독이 없어지니 블로그오기가 힘들어 FaceBook
    따라와서 즐겨찾기합니다.^^

  13. addr | edit/del | reply Favicon of https://greenhrp.tistory.com BlogIcon 제철찾아삼만리 2014.07.23 17:16 신고

    길...결국은 만드는 사람의 것인게지요..
    그런사람이 많아졌으면좋겠습니다..

  14. addr | edit/del | reply Favicon of https://seattlemom.tistory.com BlogIcon The 노라 2014.07.24 09:06 신고

    여기든 저기든 사회에 희망이 없다는 생각으로 참 답답했어요. 그런데 맞네요. 희망은 만들어 가는 것이였어요.
    여러 사람들과 함께 희망을 만들어 가야겠습니다. ^^*

  15. addr | edit/del | reply Favicon of https://blogmania.tistory.com BlogIcon ILoveCinemusic 2014.07.24 20:20 신고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절망감에 빠진 요즘 한줄기 희망처럼 느껴지는 글귀네요.

  16.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봉봉 2014.12.21 01:01

    노자의 도덕경에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이라는 구절과 같은 맥락이라 생각되네요..좋은글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