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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근했던 봄 햇살이 여름으로 녹아 들어가던 2009년 5월, 지구본을 몇 바퀴 돌려도 찾기 힘든 반도의 나라 대한민국에서는 오 천년 세월을 거쳐 뼛속까지 스며든 아름다운 전통이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그건 바로 죽은 자를 안타까이 보내려던 시민들의 자발적 추모행렬과 그의 죽음을 자신의 반이 무너져 내린 심정이라고 슬퍼하던 선배 대통령의 추모사가 공권력에 의해서 방해를 받은 사건이다.
그렇게 인간 노무현은 핏빛 오월 햇살에 기꺼이 자신의 몸을 맡기고 부엉이가 되어 우리 곁을 떠나갔다.
2009년 5월23일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적지 않은 페이지를 할애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전직 대통령의 충격적인 자살과 그의 죽음이 일깨운 시민 스스로의 각성이라는 극적 반전까지. 노무현을 죽음에 이르게 한 정치적 사회적 배경에 대한 연구에서 그의 죽음을 통해 부당한 권력에 시민들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까지 그야말로 ‘노무현 알기’ 열풍으로 여름을 더욱 뜨겁게 달구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확산시키기 위함이었을까? 오마이뉴스 오연호 기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죽기 전 가진 여덟 차례의 인터뷰 내용을 정리해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라는 책으로 출간했다. 무엇보다 오연호 기자는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보수언론의 무자비한 횡포에 가로막혀 쾌남 노무현이 시민들에게 하지 못했던 속마음을 진솔하게 보여주기 위해 참을 수 없는 기자 본능을 잠시 접는 절제력을 보여주고 있다.
오연호 기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재임 기간 중 ‘열외적 인터뷰’라고 자평할 만큼 어느 언론사도 불가능했던 심층 인터뷰를 통해 여섯 명의 노무현을 재탄생시킨다. 바보 노무현, 정치인 노무현, 대통령 노무현, 정치학자 노무현, 사상가 노무현, 인간 노무현.
‘희망’은 여섯 명의 노무현을 통해 저자가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절실한 메세지이다. 희망만이 암울한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시민권력의 출현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 날 시청역 근처에서 ‘내 마음속의 대통령’이라는 글자와 노무현의 얼굴이 새겨진 풍선을 불고 있는 젊은 대학생을 보게 된다. 그 젊은이가 바로 “당신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지키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스무 살 대한민국 희망” 이라고 추모글을 적고 있던 신희망씨이다. 저자는 희망씨에게 여섯 명의 노무현을 얘기해 주는 방식으로 글을 전개하고 있고 진정한 시민권력의 탄생을 위해 부족한 그대로 동지가 되자며 글을 맺는다.
그렇다면 재임 중 어느 전직 대통령보다 진보와 보수 틈바구니에서 논란의 중심이 되었던 노무현이 이루고자 했던 꿈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권력의 정점에 서 있으면서도 또 다른 권력의 출현을 바라고 있었다. 지금의 권력은 일시적이고 순간적일 뿐, 그에게 진정한 권력은 시민들의 자발적 각성으로 출현해야 할 시민권력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학습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도 그랬지만 그는 바보스럽게도 보수언론과 수구세력들, 심지어 자신의 고향으로 생각했던 진보세력들로부터 갈기갈기 찢기면서도 조직된 시민권력의 창출을 위해 부단이 공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시민사회, 시민권력에 대한 학습을 통해 노무현은 바보 노무현에서 정치인 노무현, 대통령 노무현, 정치학자 노무현, 사상가 노무현으로 변모하게 되고 시민권력을 본격적으로 실천에 옮기게 될 퇴임 후에는 인간 노무현으로 진화해 간다.
이라크 파병과 한미FTA 등으로 그의 지지자들과 유대감이 느슨해지고 때로는 결별하는 아픔을 무릎쓰면서까지 그가 꿈꿔왔던 시민권력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8년간 노무현과 심층 인터뷰를 해왔던 저자는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하고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노무현이 그렇게 역설했던 시민권력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또 보수언론의 융단폭격으로 노무현의 참모습을 알지 못했던 시민들도 이명박 정부의 민주주의에 대한 역주행을 보면서 시민권력의 필요성을 어렴풋하게 인식하게 되고 급기야 노무현의 죽음으로 시민들 개인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있던 각성이 분출하게 된다.
오연호 기자는 ‘열외적 인터뷰’를 정리한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로 시민들 개개인에게서 분출되는 시민권력에 대한 각성을 하나의 조직된 시민권력으로 승화시키려고 한다. 깔끔하게 잘 정리된 노무현의 ‘정치학 강의’를 통해…
글머리에는 정부의 반대로 무산되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추도사가 추천사를 대신하고 있다. 수십년간 노무현과 정치적 동지였고 그의 가치를 경험했고 그래서 영결식장에서 참았던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우리가 깨어 있으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죽어서도 죽지 않습니다.”
라는 말로 애도와 함께 시민들의 각성을 촉구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김대중 전대통령도 사랑하는 후배 정치인을 잃은 슬픔이 너무도 컸던 탓일까? 그 해 8월 그도 노무현 전대통령과의 천상해후를 하게 된다.
그리스 신화에 판도라의 상자라는 이야기가 있다. 제우스는 판도라에게 세상의 모든 죄악과 재앙을 넣은 상자를 주고 인간 세상으로 내려가게 했다. 상자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길이 없었던 판도라는 호기심이 발동해 상자를 열고 말았는데 그때 모든 재앙과 죄악이 날아가고 상자 안에는 희망만이 남아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반대로 재앙과 죄악을 남긴 채 희망만이 날아갔다는 설도 있다.
이명박 정부 출범 후 우리는 미네르바 구속, 용산참사 등을 보면서 희망이 없어진 판도라의 상자를 보았다. 그러나 노무현 전 대통령을 애도하는 500만 추모행렬 속에서 힘겹게 호흡하고 있는 희망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판도라의 상자도 볼 수 있었다.
오늘의 역사 역행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선홍빛 5월을 노란색 희망으로 다시 색칠하기 위해서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만이 대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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