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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엽기적 결말에 담긴 삶과 죽음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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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천운영/2004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입관하던 날 차마 울 수가 없었다. 앙상한 뼈 마디마디에 가죽만 볼품없이 붙어있었지만 얼굴만은 생전에 볼 수 없었던 너무도 편안한 표정으로 입술을 살포시 다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한테 퍼주기 좋아하셨지만 되돌아오는 건 배신과 가난뿐이었기에 술로 시름을 달래셨고 급기야 어디 성한 데 하나 없는 몸은 밤마다 들릴 듯 말듯 괴로운 신음소리만 연주했던 아버지였지만 그날만큼은 근심 걱정 하나 없는 표정으로 누워계셨으니 눈물을 훔치는 게 예의가 아니지 싶었다. 정작 서러운 눈물은 화장이 끝나고 아버지의 유골을 보여주었을 때였다. 남한테는 마냥 좋은 사람이 늘 그러하듯 아버지도 자식들에게는 그리 살갑지 못했고 게다가 나 또한 부침성 없는 성격이라 평생을 부자지간의 정을 제대로 나눠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유골을 보는 순간 비로소 아버지가 내 안에 들어온 듯 했다. 이승에서의 마지막 이별이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와 나의 관계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피상적인 죽음의 정의는 소멸이다. 삶의 소멸이고 관계의 소멸이다. 삶의 마지막 여정이 죽음이고 인간은 그 마지막 여정을 향해 쉼없이 달려간다. 죽음이 없다면 삶이란 단어도 존재하지 않았을 터, 삶의 전제조건은 죽음이다. 그렇다면 남아있는 자에게 죽음은 어떤 의미일까. 망자에게 죽음이 소멸이듯 남아있는 자에게도 죽음은 망자와의 영원한 단절로 끝나는 것일까. 천운영의 소설 <명랑>은 죽음이 산 자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하는 과제를 던져준다. 성급하게 결론을 내린다면 '삶과 죽음에 관한 명랑 보고서' 정도면 어떨까. 

 

벼랑 끝에 선 사람들

 

필자의 부제와 달리 소설 <명랑>은 썩 명랑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결코 우울하지도 않다. 죽음의 문제 앞에서 명랑해질 수도 없거니와 죽음을 대하는 저자의 태도를 간파한다면 결코 우울하지도 않다는 말이다. 소설 <명랑>은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딸에 이르는 삼대의 이야기다. 할머니를 중심으로 서로의 긴장이 큰 구조를 이루는데 화자인 '나'가 딸이 되기도 하고 어머니가 되기도 한다. 특히 죽음으로 향해 가는 할머니에 대한 묘사는 숨이 멎을 듯 느린 템포로 진행된다. 마치 삶에 대한 끈질긴 열망을 놓지 않으려는 듯.

 

문이 움직인다. 느리고 은밀하게, 딱 한 뼘만큼만 열린다. 벽과 똑같은 색의 미닫이문은 낯선 세계로 통하는 비밀 통로 같다. 열린 문으로 어둠이 밀려나온다. 어둠 속에는 늙은이의 살냄새에 곰팡이 핀 과일, 눅눅한 솜이불, 좀약 냄새가 뒤섞여 있다. …중략… 그녀의 발은 촉수를 세운 더듬이다. 공기의 미세한 움직을 탐색하고 위험을 감지한다. …중략… 그녀의 손은 말라비틀어진 빵 같다. 뼈와 핏줄이 드러난 얇은 살갗 위에는 저승꽃이 곰팡이처럼 무리지어 피어있다. -<명랑> 중에서- 

 

 

소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들 삼대 모녀의 삶은 우리 사회 각 세대의 축소판과도 같다. 식당 구석진 방에 처박혀 죽음을 준비하는 할머니로 대변되는 노인 세대, 온갖 삶의 풍파를 견뎌내며 살아왔지만 여전히 부모와 자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어머니의 중·장년 세대,  국가정책의 무관심 속에 백수의 삶을 이어가고 있는 손녀이자 딸인 청년 세대. 이들의 긴장은 상대를 통해 각자의 빈 공간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전족을 한 것처럼 작고 위태로운 할머니에게 손녀 딸의 젊음은 영원히 머물고 싶은 안식처일 것이다. 반대로 제대로 된 직업도 구하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는 손녀 딸에게 과거의 회한과 곧 닥쳐올 죽음에 대한 공포가 함께 침묵하고 있는 할머니의 눈동자는 벗어나고픈 현실의 종착역과도 같다.

 

나는 늙은이의 눈을 갖고 싶다. 바라보면서도 어딘가 다른 곳을 향해 있는, 마른 듯하면서도 젖어 있는, 간절하면서도 무심한 늙은이의 눈동자. 무엇에도 잡히지않는 시선의 자유로움이 노인의 눈동자에는 들어 있다. 어쩌면 나는 늙은 여자가 되고 싶은지도 모른다. 세월의 고난을 거치지 않고서 곧바로 늙은 여자가 되어 세상을 비껴보고 싶은 것이다. -<명랑> 중에서-

 

어머니에게 할머니는 애증의 관계다. 평생 궂은 일 한 번 해보지 않은 할머니를 대하는 어머니는 스스로를 싸움닭에 비유한다. 그것은 남편을 잃고 유원지 근처 식당을 운영하면서 며느리로서, 어머니로서 살아가야만 삶의 무게에 대한 항변이다. 그렇지만 어머니(할머니)가 원하는 것은 뭐든 해주려고 한다. 딸(손녀딸)에게 이런 어머니의 할머니와의 관계는 또 다른 긴장의 요소이긴 하지만 한편 어머니의 고단했던 삶을 알기에 부러 불퉁거리기도 한다.

 

엄마에게서는 누린내가 난다. 비에 젖은 개털 냄새, 찬바람에 노출된 가죽 잠바 냄새. 엄마에게서 풍기는 냄새는 여자의 냄새가 아니다. 엄마의 목소리가 굵어지면서, 수염이라도 난 것처럼 코밑이 검어지면서부터 풍기기 시작한 그 냄새는, 사내들의 콧바람에서 묻어나오는 역겨운 냄새와 닮아 있다. 늙어가는 여자들에게서는 왜 남자 냄새가 나는 걸까. -<명랑> 중에서-

 

죽음은 또 다른 삶의 시작

 

베어진 풀, 썩어가는 과일, 짓이겨진 꽃잎 등 죽어가는 것들은 더욱 강한 향을 내뿜는다는데 손녀딸은 어머니에게서, 할머니에게서 이런 죽어가는 것들의 강한 향을 맡는다. 자신에게서 나는 달콤하고 경쾌하고 신선한 향기는 전혀 모르는 채.

 

죽어가는 것들의 강한 향을 지우기 위한 의식일까 할머니가 만병통치약처럼 복용하는 명랑은 이미 부패가 시작된 할머니가 부패의 냄새를 감추기 위해 끊임없이 투여하는 방부제 같다. 명랑은 진통제다. 명랑 백 포들이 상자 겉면에는 두통을 비롯한 관절통, 인후통 등 열여섯 가지 통증과 오한, 발열시 효능이 있다고 적혀 있다. 하루 2회 복용이라는 한도가 있지만 할머니는 마치 설탕 가루처럼 시도 때도 없이 털어넣는다. 죽음을 앞둔 할머니의 삶에 대한 열정과 바램이 명랑이라면 소설 말미에 등장하는 할머니의 유골은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썩지 않게 하는 또 하나의 명랑이다.

 

그녀가 먹은 것은 약이 아니라 방부제인지도 모른다. 그녀에게서 나는 늙은이 냄새 또한 죽음을 위장하는 방부제 냄새가 분명하다. 그녀 몸 구석구석에는 채 녹지 않은 명랑 가루가 그대로 쌓여가고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죽어도 썩지 않으리라. 나무뿌리가 관 뚜껑의 틈을 벌리고 그 틈새로 떨어진 흙이 그녀를 덮치는 동안에도 그녀의 머리칼은 잔뿌리처럼 쑥쑥 자라날 것이다. -<명랑> 중에서-

 

죽음이 상징하는 소멸을 거부하는 저자의 시선은 할머니의 점점 부풀어오르는 가슴을 통해서도 상징적으로 나타난다. 세 사람의 긴장이 풀려갈 즈음 엄청난 폭우에 계곡물이 불어나 유원지를 따라 늘어선 식당들이 폭우에 휩쓸려 가고 주인공의 식당도 토사와 바위들에 묻혀 형체를 찾아볼 수 없을만큼 처참한 광경이 펼쳐진다. 할머니는 그 흙더미 속에서 아버지의 회독 오른 발 같았던 맨발을 드러내놓고 죽고만다.

 

조금은 엽기적(?)이랄 수 있는 장면이 나오는 대목이다. 손녀딸은 납골당에 넣기 전 꼭 흰 명랑 가루 같았던 할머니의 유골을 작은 상자에 담아 두었고 할머니가 생각날 때마다 손가락에 침을 묻혀 조금씩 맛보곤 한다는 장면이다. 한 사람, 한 가족의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의 시작이자 갈망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할머니가 썩지않기 위해 연신 명랑을 복용하는 것처럼.

 

내 내부에는 언제나 나를 바라보며 침묵하는 그녀가 있다. 그녀는 내 속에서 숨쉬고 내 속에서 잠을 잔다. 그녀는 가끔 내 속에서 버선발을 내밀기도 한다. 나는 그녀를 위해 명랑을 먹는다. 설탕처럼 하얗고 반짝이는 명랑 가루에서는 그녀 냄새가 난다. -<명랑> 중에서-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어쩌면 삶의 여정 자체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마라톤인지도 모를 일이다. 소설 <명랑>은 죽은 자와 산자, 죽음과 삶의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죽음을 통해 얻고자 하는 삶에 대한 강렬한 열정이 숨어있다. 삶이 너무 무거워 지치고 쓰러질 때 우리도 명랑 가루가 들어있는 오각형으로 접힌 약종이를 펼친 다음 대각선으로 접어 가루를 한 데 모아 입에 텋어넣어보는 것은 어떨까. 누구나 가지고 있을 자기만의 명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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