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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부자들의 허위의식을 고발한 촌철살인의 한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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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섬옥수/황석영/1973년

 

드라마 속 가난한 여주인공 앞에는 늘 '실장님'이 등장한다. '실장님'의 포스는 외모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잘생긴 얼굴에 훤칠한 키, 게다가 상대가 하류인생일수록 더 깍듯해지는 매너까지. 어디 하나 빠진 구석이 없는 완벽한 남자가 드라마 속 '실장님'의 캐릭터다. 또 한가지 뻔한 사실은 '실장님'은 늘 재벌가 2세거나 속칭 잘 나가는 기업의 모든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차세대 실력가라는 점이다. 그런 '실장님'은 꼭 한 여성의 비루한 인생을 책임진다는 게 알고도 속는 인기 드라마의 불편한 진실이다. 결국 그저그런 삶을 살아왔던 여자 주인공은 비로소 신데렐라가 되어 여성 시청자들의 부러움과 질투의 대상이 되기에 이른다. 

 

'신데렐라 콤플렉스'란 성공하기 위해 자신의 노력이 아닌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으려는 심리나 의존심리를 비꼬아 하는 말이다. 콜레트 다울링의 저서 <신데렐라 콤플렉스>에서 처음 사용됐다는 이 말은 자신의 운명을 변화시키기 위해 어떤 노력도 하지 않은 채 동화 속 왕자만 기다린다는 지극히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여성의 허황된 꿈을 비판한 것이다. 물론 드라마 속에서 신데렐라가 된 여주인공이 이런 삶을 산다면 욕을 바가지로 먹게 될 것이다. 어쨌든 현대사회에서 '신데렐라 콤플렉스'는 스토리의 주인공이 남자로 변형되어 '남데렐라 콤플렉스'라는 우스개 신조어가 있다고 한다. 황석영의 소설 <섬섬옥수>에 등장하는 김장환처럼 말이다.

 

미리 씨를 아내로 갖고 싶다는 신념이 생기자마자, 여태껏 내가 잘해왔노라고 자부하던 목적이 형편없이 초라하게 변해버렸습니다. 갖은 고생으로 바라온 게 겨우 학교 훈장이 뭐란 말이냐? 요즈음 여기서는 한 남자의 사회적 능력의 표징은 그가 거느린 여자의 됨됨이로 나타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똑똑하고 아름답고 최고의 수준으로 교육받은 여자……그것은 바로 남자가 얼마쯤의 신분으로 직결되는 선을 통과했느냐 하는 물적 증거 자체입니다. -<섬섬옥수> 중에서-

 

얼핏 <섬섬옥수>는 황석영답지 않은 소설처럼 느껴진다. 젊은 남녀의 연애담, 러브 스토리가 노동자, 농민 등 기층민중의 문제에 천착해온 그의 글쓰기와는 꽤 거리감이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한편 내가 느꼈던 황석영답지 않은 소설이라는 것은 그의 작품 중 극히 일부만 읽어보고 침소봉대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노작가의 오래된 소설을 통해 색다른 신선함을 느끼는 것도 책읽기의 또 다른 재미는 아닐런지…….

 

소설 <섬섬옥수>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민중소설이나 계급소설이 아니지만 등장인물들은 모두 각각의 계급에 투철한 소명의식을 갖고 산다는 점이다. 부르주아 계급에 맞서 자존심을 잃지 않으려는 관리실 공인(工人) 상수, 지방 유지의 딸로 전통적 부르주아 계급의 사고에 젖어있는 박미리,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명문대에 입학해 신분상승의 꿈을 꾸고 있는 김장환, 부잣집 아들로 드라마 속 '실장님' 같은 포스가 느껴지는 장만오 등 이들은 자기만의 삶에 충실한 젊은이들이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들이 서로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은 다름아닌 연애와 사랑과 결혼이다. 얼키고설킨 관계 속에서 이들의 계급의식은 보다 명징하게 나타난다.

 

약혼한 사이였던 장만오의 사랑을 구속으로 느꼈던 미리는 파혼을 선언하게 되고 그 와중에 한 남자를 알게 된다. 미리에게 가진 자의 허위의식을 벗게 해준 장본인이기도 하지만 관리실 공인에 불과했던 상수에 대한 미리의 관심은 철저한 계급적 차별의식으로 사랑마저 일종의 놀이로 전락시키고 만다. 상수의 첫인상을 어릴 적 시골집의 턱없이 양순하기만 하던 잡종개로 치부했던 미리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이미 상수가 들앉아 있음을 애써 부인하기 위한 몸부림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그런 종류의 무지스런 남자가 나 같은 여자에게 보내는 시선의 의미를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우리 같은 여대생을 본다는 것은 이미 약속을 깨뜨리기 시작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어떤 약속인가 하면, 소가 닭을 보는 것처럼, 전혀 살아온 환경과 계층이 다른 사람들끼리 상대를 피차의 입장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약속이다. -<섬섬옥수> 중에서-

 

한편 미리를 짝사랑한 김장환의 끈질긴 구애도 상당한 비중으로 다루어진다. 앞서 언급한 '남데렐라 콤플렉스'가 조금은 지나친 비유이긴 하지만 김장환에게 신분상승은 일생일대의 포기할 수 없는 꿈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녹녹하지 않다는 것. 김장환이 미리와의 결혼을 통해 신분상승의 꿈을 이루려는 모습은 '남데렐라 콤플렉스'를 넘어 주목을 끄는 것은 1970년대 당시와 21세 오늘 서민들의 숙명과도 같은 비루한 현실이 겹치고 또 겹치기 때문일 것이다. 미리를 만나기 위해 여학생 기숙사를 침입한 죄로 경찰서에 끌려간 김장환이 '제 성공에는 한계가 있습니다.'라고 말한 대목이 긴 여운을 남기는 것도 이런 변하지 않는 본질 때문이다.

 

장만오와의 파혼과 김장환의 일방적 사랑, 비록 계급적 차별의식을 뛰어넘지는 못하고 있지만 상수에의 끌림 등을 통해 미리는 그동안 자신을 휘감고 있던 허위의식에 대해 깨닫게 된다. 

 

나는 눈을 꼭 감고 잠이 들었다. 꿈도 꾸지 않았다. 그냥 벌건 어둠과 갈잎의 서걱이는 소리만 있었다. 참으로 아늑하고 짧은 잠이었다. 그렇게 축복받은 잠에 빠졌던 때가 평생 몇 번이나 있었을까. 나는 관능의 입구를 활짝 열어놓고 내가 여태껏 잘못 길들여왔던 세상의 찌꺼기를 씻어낸 것 같았다. -<섬섬옥수> 중에서-

 

그러나 여전히 계급의 벽을 넘을 수 없었던 미리와 상수. 소설은 스킨쉽을 거부한 미리를 향한 상수의 투덜거림으로 막을 내린다. 

 

"똥치 같은 게 겉멋만 잔뜩 들어가지구."

 

이 말은 여전히 허위의식에 젖어있는 미리를 향한 상수의 외침이기도 하지만 저자가 당시 사회를 향해 던졌던 촌철살인은 아니었을까. 황석영이 우리사회 가진 자들의 왜곡된 성공신화의 그림자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던 최근작 <강남몽>의 시대적 배경 출발점이 1970년대라는 점에서 저자의 시대인식을 분명하게 보여준 한마디라고 할 수 있겠다. 권력을 등에 업고 민중들의 피와 땀의 댓가로 성공신화를 쓴 사람들. 그들의 비열한 성공신화를 합리화하기 위해 허위의식으로 무장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작가 정신을 저자는 이렇듯 젊은 남녀의 러브 스토리를 통해 과격하지 않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소설의 주제를 정치적으로 해석하기에는 이들의 사랑에는 뭔가, 계급적 차별의식 이상의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이들의 사랑은 어딘가 모르게 왜곡되고 서툴러 보인다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고동치는 마음을 애써 계급차별의 뒤에 숨기고 있는 것이다. 특히 많은 여자를 만나봤다고는 하지만 소설 마지막 장면에서 미리에게 입맞춤을 하는 상수의 행동이 미리에게는 무의식적이고 기계적이었다는 것과 표정 또한 너무 무심했다는 표현에서 마음이 움직이는대로 살지 못한 젊은 남녀의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저자는 존재하는 계급적 차별의식의 한계보다는 보다 사람다운 감정으로 살아갈 수 있는, 감정에 충실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사는 세상에의 염원을 더 간절히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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