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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청춘의 방황, 이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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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숙(1931년~)의 <신화의 단애>/1957년

 

대표적인 전후작가 중 한 명인 손창섭은 그의 소설 <비 오는 날>에서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이 가져다 준 허무주의와 자조와 냉소, 인간의 무력한 삶을 객관적이고 처절하게 묘사한다. 그의 또 다른 소설인 <공휴일>과 <잉여인간> 등에 등장한 주인공들 또한 철저하게 비상식적인 전형들로 삶에 대한 뚜렷한 이유가 없는 인간들이다. 그의 소설에서 주인공들이 대부분 비정상인으로 설정된 것도 결코 정상적일 수 없는 전쟁에 대한 저항의 표시일 것이다. 반면 같은 전후작가인 한말숙의 소설 <신화의 단애>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손창섭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과는 전혀 다른 캐릭터로 전쟁의 참상을 고발해 준다.

 

한말숙, 작년 박완서 작가가 타계했을 당시 언론 보도에서 얼핏 들었던 것 빼고는 전혀 생소한 이름이다. 검색을 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평소 "내 속에 박완서가 있다"고 말할 정도로 박완서 작가와는 여고 동창으로 60년 단짝이라고 한다. 가야금 명인 황병기씨의 아내라는 검색 결과에 깜짝 놀라기도 했는데 국제펜클럽한국본부로부터 노벨문학상 후보로 자주 거론되는 소설가라는 결과에 또 한 번 놀랐다. 검색어 한말숙과 함께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실존주의', '실존성' 논란이었다. 1950년대 문단에 '실존성' 논란을 불러일으킨 소설이  바로 한말숙의 <신화의 단애>다.

 

실존주의란 19세기의 합리주의 관념론이나 실증주의에 반대해 개인의 주체적 존재성을 강조하는 철학사상으로 역사나 과학의 일반적인 법칙으로는 인간의 개인적 주체성을 설명할 수 없으며 죽음, 절망, 불안, 허무 등 인간의 일정한 낱낱의 상황에서 자유로운 주체성을 돌이킬 것을 주장하고 있다(다음지식검색 인용). 그렇다면 <신화의 단애>에 등장하는 어떤 내용들이 '실존성' 논란을 불러일으켰을까.

 

소설 <신화의 단애>는 우선 그 설정이 파격적이다. 한국전쟁 직후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젊은 세대의 모습을 그린 소설 속 주인공 미대생 진영은 하루의 잠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댄서로 일하고 남자친구의 하숙방을 아무 꺼리낌없이 드나든다. 등록금 마련을 위해서는 낯선 남자와의 계약동거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하루살이 인생이다. 그렇다고 이런 진영을 향해 무작정 손가락질을 해댈 수는 없다. 전쟁이라는 비극은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발생하지만 전쟁의 참상을 오롯이 보듬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 또한 개인이기 때문이다. 불가항력의 운명 앞에 가장 미력한 존재가 인간이다. 

 

주인공 진영에게 삶이란 그저 '지금 나는 살고 있다'란 한 문장으로 표현된다. 진영에게 도덕이니 윤리니 하는 것들은 거추장스러운 악세서리일 뿐 중요한 것은 오늘을 온전히 살아내는 것이다. 전쟁이 가져온 경제적 정신적 궁핍, 미래를 꿈꿀 수 없는 불안과 공포를 탈출하기 위한 방황과 허무주의적 반항은 전후세대의 대표적인 정신적 병리현상이다. 진영은 전후 젊은 세대의 상징적 인물이라 하겠다. 

 

"성모 마리아, 나에게 애인을 하나 마련해주세요. 영원한 애인을요." 진영은 경건한 마음으로 속삭였다. 그러나 이내 그 마리아상(像)의 졸렬한 조각이 눈에 띄어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서 진영은

"마리아, 좀 더 기다리세요. 내가 당신을 조각해드리겠어요."

했다. -<신화의 단애> 중에서-

 

진영이 느끼는 자신의 존재감은 순간의 쾌락과 감정에 철저히 충실했을 때로 기성의 도덕과 윤리와 가치로는 절대적인 가치를 거부한 채 현재적 삶에 천착하는 모습은 실존주의의 특징 그대로다. 군고구마로 허기짐을 채우고 따뜻한 방에 누운 진영에게 '지금 나는 행복하다'는 감정이면 그만인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왜 전후 세대의 병리현상을 자유분방한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드러내려 했을까. 아마도 여성에게 주어지는 이중의 실존적 위기감 때문일 것이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삶 속에서 누구나 기성의 가치체계로 살아가기 힘든 건 마찬가지지만 여성에게 주어진 전통적 윤리체계와 사회적 시선은 이중의 압박이고 고통일 것이다. 특히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여전히 전통적 가치들이 완고하게 남아있던 1950년대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저자는 소심하지만 여성해방의 문제까지 언급하려 하지는 않았을까? 어쨌든 이중의 실존적 위기감에 처해있던 여성을 주인공으로 설정한 것은 전쟁이 가져다 준 극단적 허무주의와 허무주의적 방황을 보다 비극적으로 묘사하는 데 가장 적절한 방법이지 않았을까 싶다.

 

사랑 사랑……진영은 그 말의 감각을 느껴보려 했으나, 그 추상명사가 마치 숫자처럼 그의 머릿 속에서 나열될 따름이다. 사랑이라는 말은 필요치 않았다. 다만, 진영은 지금 경일을 포옹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래서 진영은 경일씨 어서 오세요, 보고 싶어요 라고 편지의 끝을 맺었다. -<신화의 단애> 중에서-

 

알다시피 '단애'는 낭떠러지, 절벽이다. 당시 시대상황이 절벽 위에 선 절망적인 상황이었다면 소설 속 전후 젊은 세대의 방황은 또 다른 '단애'를 향해 걷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문득 요즘 젊은 세대, 청춘들도 '단애의 신화'를 쓰고 있지는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미래를 준비해도 그 길 끝에 맞닥뜨린 건 늘 단애뿐이니 말이다. 단애의 끝자락에 서지 않기 위해 방황하고 반항하는 모습이 때로는 기성세대의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안길 수 있을만큼 기성의 체제와 체계가 온전하지도 않다. 실존적 허무주의, 허무주의적 방황은 시간을 뛰어넘어 재연되고 있는 것이다. 단지 그 원인이 전쟁이 아닐 뿐.

 

허무주의적 방황이 비단 청춘들만의 실존적 문제는 아니지싶다. 사회적 안전망은 부실한 가운데 절망적 상황만을 강요하는 사회와 국가는 모든 세대를 실존적 허무주의의 '단애'로 내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핑계없는 무덤은 없다'라는 속담이 적절한 인용인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에 원인없는 결과는 없다. 부유하는 청춘의 방황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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