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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전설/중국

신농, 현진건의 설렁탕이 떠오르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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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력거꾼 김첨지는 그날 따라 운이 좋았다. 님이 줄을 잇고 자신의 구역이 아닌 곳에서도 손님을 태웠다. 그야말로 행운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이런 행운에도 불구하고 김첨지에게는 알 수 없는 불안이 엄습해 오고 있었다. 아내는 열흘째 아파 누워 있었고 세 살배기 아이는 아픈 엄마 젖이나 빨며 굶주리고 있을 터였다. 게다가 아내는 아침에 일을 나서는 그를 말리기까지 했다. 소설에서 불길한 예감은 늘 틀리는 법이 없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고주망태가 된 김첨지는 집으로 갔다. 불길한 예감을 애써 지우려는 듯 누워있는 아내를 일부러 걷어 차보기도 하고 소리도 질러보지만 아내는 이미 주검이 되어 있었고 아이는 죽은 엄마의 빈 젖을 빨다 지쳐 탈진해 있었다. 김첨지는 닭똥 같은 눈물을 쏟아내며 푸념을 한다

 

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에서 김첨지가 아내를 위해 사온 게 값비싼 고급 음식이었다면 그 비극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으리라. 누구나 오다 가다 간단하게 한 끼 때울 수 있는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 설렁탕이었기에 독자도 김첨지와 함께 눈물을 흘릴 수 있었을 것이다. 신화 얘기를 하다 옆길로 새도 한참 새고 말았다. 어쨌든 중국 신화에서 여와의 계승자 신농[神農,  Shennong] 이야기를 시작하려니 문득 설렁탕이 떠올랐고 설렁탕 하니 또 현진건의 소설이 뇌리를 스쳤다. 무슨 관계가 있긴 있는 모양인데 그 이유는 마지막에 설명하고자 하고 우선 신농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자

 

중국 신화에서 신농은 농업의 신이자의약의 신약초의 신으로 통한다. 신농이 사람의 몸에 소의 머리를 가진 것으로 묘사된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신농은 또 불을 관장하기도 했기 때문에 염제[炎帝]라고도 부른다. 즉 염제 신농은 태양의 신이기도 한 것이다. 농사와 해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에 자연스레 추측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신농은 태어날 때부터 인신우두[人身牛頭]였다. 태어난 지 사흘 만에 말을 하고 닷새 만에 걸었다고 하니 어릴 적부터 범상치는 않았나 보다.

 

염제가 신농 또는 신농씨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가 최초로 나무를 깎아서 호미를 만들고 나뭇가지를 구부려서 호미를 만든 농기구의 발명자이자 인간에게 최초로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차를 즐기는 중국 문화의 시조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신농은 황제와 더불어 중국인의 시조로 여겨지기도 한다. 약을 발명하고 병을 치료했던 의약의 신으로도 불리기 때문에 그의 죽음도 이와 관련된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신농은 풀의 성질을 파악해 그 효능을 따져 약초로 쓰려 했기 때문에 하루에도 수십 종의 독초를 맛보면서 그 독성을 파악했다고 한다. 그러니 중독의 덫을 피해갈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약초를 발견하고 병을 치료했던 신농이지만 정작 자신은 독초에 중독되어 죽었다고 한다. 중국인들이 요즘 다양한 차문화를 즐기는 것도 신농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횃불을 처음 발명한 것도 신농이라고 한다

 

다시 설렁탕 얘기로 돌아가 보면 서울시 동대문구 제기동에는 선농단이라는 제단이 있다. 선농단은 조선시대 봄이 되면 임금이 직접 참석해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농업사회였던 조선에서 이 행사는 상당히 큰 규모로 진행되었으리라. 또 임금은 이 때만은 백성들과 함께 직접 소를 몰고 밭을 가는 의식을 했다고 하니 그 행사의 중요성을 가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제사가 끝나면 임금은 백성들에게 술과 음식을 내렸는데 바로 그 음식이 소뼈를 푹 고은 선농탕이었다고 한다. 이 선농탕이 지금의 설렁탕이 되었다고 한다. 물론 설렁탕이 몽고어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선농단에서 제사를 지냈던 그 곡식의 신이 바로 신농[神農]이었다.<여강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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