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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따따부따

헌법정신 짓밟은 교학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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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경향신문 2013년 10월1일/세상읽기/역사학자 전우용

 

역사란 과거 사실들에 대해 특정한 인간 집단이 공유하는 기억이다. 그런데 어떤 사건을 기억하는 방식이나 태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누구나 자기 처지와 기준에서 과거를 기억한다. 그러다보니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서도 ‘역사’는 자주 ‘전쟁’의 원인이 되곤 한다. 많은 언쟁이 “그때 네가 그랬잖아.”라는 말에 대해 “내가 언제?”라고 대답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평생을 함께 산 부부조차 같은 일을 달리 기억하는 탓에 다투는 일이 흔한데, 서로 살아온 경로가 다른 사람들에게 같은 기억을 요구하는 것은 본래 무리한 일이다. 소수자가 보는 역사, 지배자가 보는 역사, 여성이 보는 역사, 남성이 보는 역사가 다 같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국사’는 다양한 관점과 태도를 지닌 사람들에게 ‘공통의 기억 요소’들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을 ‘하나의 국민’으로 통합하기 위한 역사다. 그래서 ‘국사’와 ‘한국사’ 사이에는 상당한 간격이 생길 수밖에 없다. 누구나 자기 관점에서 어떤 지역, 나라, 집단에 대해 연구하고 그 결과를 발표할 수 있다. ‘일본 군인의 관점’이나 ‘중국 기업인’의 관점에서 과거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연구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학문 영역으로서 ‘역사’의 무대는 다양한 시선과 관점, 태도가 서로 얽히는 공개된 마당이다.

 

 

              ▲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표지 

 

하지만 ‘국사’는 ‘대한민국 국민의 관점에서 보는 한반도의 역사’만을 지칭한다. 일본인 학자가 쓴 ‘한국사’는 ‘국사’가 될 수 없다. 국가는 ‘자국민의 관점’에서 과거를 기억하라고 요구하며, 그 요구 사항을 ‘검정 기준’으로 명시한다. 일본인이 쓴 ‘한국사’ 책이라면 “메이지유신의 원훈(元勳)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인 테러리스트 안중근에게 암살당했다”고 해도 무방하지만, ‘국사’ 책에는 “안중근 의사가 한국 침략의 원흉(元兇)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고 써야 한다.

‘국사’ 체계에 대한 근본적 비판, 즉 국가가 국민의 기억을 통제하려 드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는 일각의 지적은 논외로 하자. 국민국가 체제에서는 공동의 기억이 없으면 국가를 공동체로 유지하기 어렵다는 현실론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 그렇더라도 ‘국민’으로서 공유해야 할 관점과 태도를 누가, 어떤 근거로 제시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남는다. 어떤 정파나 사회 세력이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국사’의 역사관을 함부로 뜯어고칠 수 있게 허용한다면, ‘국사’는 국민을 통합하는 수단이 아니라 국민을 정신적 내란 상태로 몰아넣는 흉기가 되고 만다.

가뜩이나 사회가 다원화, 다극화한 마당에 ‘국사’를 배운 시기에 따라 역사관마저 달라진다면, 국민 사이의 불신과 증오, 갈등과 대립은 더 격렬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국사’의 역사관은 헌법의 가치관, 즉 헌법정신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야 한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로 시작한다. 대한민국 ‘국사’의 역사관은 헌법이 명시한 바 3·1정신과 4·19정신이며 그 핵심 가치는 정의, 인도, 민주이념이다.

이미 3·1운동 당시에 기미독립선언서는 침략주의, 강권주의를 인도(人道)에 반(反)하는 ‘불의’로, 그에 맞서 싸우는 것을 ‘정의’로 규정했고, 이 정신은 헌법에 그대로 담겼다. 또 ‘불의에 항거한 4·19’라는 구절은 당시 학생과 시민들이 ‘불의’에 맞서 싸웠음을 명백히 규정한 것이다. 이승만 정권은 헌법이 적시(摘示)한 바 ‘불의’를 자행한 정권이다.

이번에 검정을 통과한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는 수준 이하의 숱한 오류도 문제지만 이 국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공유해야 할 규범적 가치인 헌법정신을 짓밟은 점이 더 큰 문제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역사를 발전시켰다면, 그에 항거한 것은 역사 발전을 저해한 어리석은 난동이 되고 만다.

이승만 정권이 ‘정의’였다면 그에 항거한 행위는 ‘불의’가 되고, 이승만이 ‘국부(國父)’라면 그를 몰아낸 사람들은 ‘후레자식’이 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헌법정신을 부정하는 역사책을 ‘국사’로 승인한 행위야말로, 대한민국을 정신적 내란 상태에 빠트리려는 내란 예비음모라 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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