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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새끼를 잡아먹는 어미 금붕어가 상징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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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가는 날/김 숨/2011년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말이 있다. 여우가 죽을 때 제가 살던 언덕 쪽에 머리를 둔다는 뜻이다. 비단 동물뿐일까. 아니 동물도 이럴진대 인간이야 오죽하겠는가. 인간은 늘 고향이라는 대상을 그리워한다.  나이가 들어 세상과 이별해야 할 때 누구나 할 것 없이 고향을 찾는다. 고향에는 나의 흔적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특히 인간의 존재가 한낱 기계 부속품화 되어 자기 정체성이라곤 작은 바람에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현대사회에서 내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고향의 존재는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단 하나의 이미지일지도 모른다. 나의 존재가 비롯되는 곳, 고향은 바로 어머니의 자궁과도 같은 곳이다.

 

김 숨의 소설 <옥천 가는 날>은 인간의 회귀본능, 즉 근원으로의 회귀를 갈망하는 현대인의 자화상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그 대상이 어머니라는 점은 또 다른 감상에 젖게 한다. 누구에게나 마음의 고향인 그 어머니가 고향에로의 여행을 갈망한다는 것은 근원으로의 회귀를 갈망하는 인간의 바램이 얼마나 절실한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소설적 장치일 것이다. 어머니와 두 딸의 옥천 가는 길. 바램이 절박할수록 옥천 가는 길은 더디기만 하다. 토요일 오후인데다 모레가 현충일이니 옥천 여행은 서울에서부터 꽉 막히고 만다.

 

 

사실 엄마가 그렇게 가고싶어 하는 옥천은 엄마의 고향이 아니다. 그저 옥천에 시집왔고 아버지가 죽은 뒤에도 옥천 집을 지키고 살았을 뿐이다. 그런 엄마가 옥천을 떠나야만 했던 것은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딴 막내딸 애숙이가 요양급여를 받기 위해 엄마를 서울로 모셔와 치매환자로 둔갑시켰기 때문이다. 내리사랑이라고 했던가. 순전히 자식의 욕심 때문에 고향처럼 여겨온 옥천을 떠난 것이다. 엄마의 서울 생활은 현대인들이 느끼는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엄마가 그렇게 가고자 하는 고향은 현대인들의 자기 정체성이 오롯이 남아있는 가장 근원적인 장소다. 오늘은 그런 엄마가 드디어 고향, 옥천을 가는 날이다.

 

소설에서 고향은 수족관 속 금붕어를 통해 형상화된다. 쉰 마리 가까이 되던 새끼 금붕어들이 어느 날부턴가 까닭없이 줄어가는 것이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사방이 꽉 막힌 수족관에서 죽었으면 사체라도 떠올라야 하는데 그 수가 줄어들고 있으니 말이다. 주인공은 그 어처구니없는 상황의 원인을 끝내 목격하고 만다. 어미 금붕어가 무심히 주둥이를 벌리고는 제 새끼를 삼키는 장면을 본 것이다. 왜 저자는 소설 처음과 끝에 수족관 속 줄어가는 새끼 금붕어의 비밀을 언급하고 있을까.

 

"배가 고픈가…?"

"배가 고프다고 제 새끼를 잡아먹어요?"

"천지에 새끼밖에 잡아묵을 게 읎었나 보구만."

"엄마도 참, 아무리 그래도……어미 뱃속이 무덤이 될 줄 새끼들이 알았겠어요?"

"어미 뱃속만한 무덤이 어데 있을까." -<옥천 가는 날> 중에서-

 

엄마에게 고향 옥천은 자궁과 같은 곳이다. 고향은 떠난 엄마에게 생명의 근원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다시 옥천으로 돌아가는 것은 인간의 근원, 자궁으로 회귀하는 것, 바로 그것일게다. 차 안에서 두 딸은 끊임없이 엄마와의 대화를 시도한다. 그러나 엄마는 묵묵부답이다. 옥천 가는 길이 너무 더뎌서일까. 기막힌 반전은 독자들로 하여금 가슴을 쓸어내리게 한다. 

 

두 딸과 운전기사의 대화 중에 운전기사가 "산 사람이 무섭지 죽은 사람이 무서워요? 강도짓을 해도 산 사람이 하지. 죽은 사람이 하는 거 봤어요?"라고 한 말에서 말없이 누워만 있는 엄마가 이미 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오늘은 엄마가 황천 가는 날이다. 그토록 그리던 고향을 죽어서야 가게 된 것이다. 맞다. 지금 두 딸은 죽은 엄마를 구급차에 태우고 장례식장이 있는 옥천성심장례식장으로 가는 길이다. 죽은 엄마를 태우고 옥천행 구급차에 탄 두 딸의 소소한 대화에서는 근원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비애라는 것이 느껴진다.

 

"애숙아, 옥천까지 버스비가 돼지고기 한근 값은 될까?"

"돼지고기 한근이 오새 얼마나 올랐는데……목살 한근에 만사천원 달라더라. 삼겹살은 만육천원이라던가?"

"돼지고기 한근 값도 안된단 말이냐?"
"한근 값은 될까?"

"아무리 차비가 헐해도 한근 값은 충분히 되겠지." -<옥천 가는 날> 중에서-

 

 

고속도로를 달리는 충북 차량이 모두 옥천행으로 보이는 것도 잃어버린 근원을 찾아가는 인간의 바램이 투영된 탓이다. 한편 모든 인간이 마음 속에 품고 있는 또 다른 고향인 어머니에 묘사는 다시 금붕어를 통해 상징화된다. 새끼를 쉰 마리나 낳은 고작해야 엄지손가락만한 금붕어가 자식을 일곱이나 낳은 꼭 여섯 살짜리 여자애같이 야위고 왜소한 엄마와 동일시되는 것이다. 고향으로서의 어머니는 자아를 잃고 방황하는 현대인들의 궁극적 안식처이며 그런 어머니가 되돌아가고자 하는 고향은 고단한 현대인들이 돌아가서 자기의 근원적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어머니의 자궁과도 같은 곳이다.

 

문득 저자는 왜 하필 엄마의 고향으로 옥천을 설정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울산이 고향인 저자에게 옥천이 남다른 의미가 있겠지 싶으면서도 '옥천'이라는 단어 자체에서 풍기는 '옥같이 아름다운 하늘나라'와 같은 뉘앙스 때문에 엄마의 영원한 휴식을 위한 장소로 옥천을 선택하지는 않았을까. 사실 옥천의 한자 뜻은 '옥같이 맑은 샘'이란다. 그보다는 정지용의 시에서 각인된 고향의 이미지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정지용의 시 '향수'의 배경이 바로 충청북도 옥천이니까.

 

넓은 벌 동쪽 끝으로/옛 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정지용의 시<향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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