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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의 눈물/전상국/1980년

 

현정부를 두고 '문민독재'라며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다. '문민정부'와 '독재정부'라는 서로 어울릴 것 같지않은 두 단어가 하나의 용어로 탄생한 데는 정치권력의 권위주의적 행태가 단지 총칼에 의해서만 비롯되지 않는다는 것을 다양한 경험으로 확인했기 때문일 것이다. 즉 눈에 보이는 권력은 저항의 근거가 확실하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합법을 가장한 숨은 권력은 정당한 저항의 통로마저 봉쇄해 버린 채 인간의 삶을 더 피폐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전상국의 문제작 <우상의 눈물>은 바로 이런 정치권력의 매카니즘을 어느 고등학교에서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는 학교폭력에 빗대어 비판하고 있다. 소설이 발표될 당시의 시대상황을 추적해 본다면 그 비판의 대상이 누구인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2012년 오늘, 30년 전 소설에서 당시보다 더 절절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합법적인 권력의 드러나지 않는 폭력이 그 어느 때보다 무자비하게 자행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 <우상의 눈물>은 기본적으로 선과 악의 대결구도로 전개된다. 그러나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어느 사회나 존재하는 이 이분법적 구도에 상당한 혼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소설 말미에 가서는 악을 상징하는 존재에 대해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하고 만다. 그것은 저자가 학교폭력이라는 설정을 통해 말하려고 한 정치권력의 매카니즘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맞아. 신이 매우 거북하게 생각하는 악마란 바로 네가 말한 놈처럼 착함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그런 순수한 악마지. 그러한 순수한 악마만이 신을 돋보이게 하기 때문에 신은 마음 속으로 괴로운 거야. 그렇기 때문에 신은 결코 악마를 영원히 추방하지 않아. 항상 곁에 두고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일에 그것을 이용할 뿐이야." ―<우상의 눈물> 중에서-

 
그러나 필자는 저자의 의도와는 달리 저자가 설정한 정치권력의 상징적 소재인 학교폭력을 '학교폭력' 그 자체로 바라보고자 한다. 교육 주체들은 물론 언론과 대통령까지 나서 보지만 근절되지 않는 '학교폭력의 매카니즘'으로 접근해 보고자 한다. 사실 '매카니즘'이란 표현이 적합한 표현인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학교폭력은 어느날 갑자기 불거진 사회문제는 아니다. 필자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도 학교폭력은 있었다. 다만 최근 들어 통신 수단의 발달로 학교폭력의 현장이 실시간으로 기사화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학교폭력이 근절되지 않는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그 원인을 고민해 보기에 앞서 학교폭력과 짝을 지어 논란이 되곤 하는 '교권추락'의 본질에 대해서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학생인권조례'에 반대하는 일부 언론에 의해서 '교권추락'의 사례들은 마치 스포츠 중계처럼 실시간으로 인터넷 공간을 도배하기도 한다. 그들의 의도야 뻔히 알고 있지만 '학생인권조례'를 무력화하기 위해 그들이 숨기고 있는 교권추락이 사실은 우리 교육의 비교육적 행태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이다. 학교 현장이 건전한 민주시민의 양성이라는 본래적 의미보다는 '공부하는 기계', '점수 따는 기계'을 찍어내는 곳으로 전락해 버린 현실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사에게 주어진 권리와 의무는 극히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결국 교권추락의 원인은 교육 당국과 몇몇의 편협한 사고로 운영되는 우리의 교육인 것이다.

 

그랬다. 슬픈 일이지만 우리들은 언제부터인가 교사들은 한낱 껄끄러운 존재로 여길 뿐 오히려 그룹 과외선생의 완벽함에 더 매료되곤 했다. 그것은 상대적이었다. 우리들이 교사를 존경하지 않는 것처럼 교사들도 우리를 사랑으로 가르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룹 과외 선생처럼 철저하게 얼굴에 철판도 깔지 못하고 어정쩡한 태도를 취했다. 문제는 지배에 대한 견해의 다름이었다. 그네들은 옛날 훈장이 누렸던 권위가 고스란히 쥐어지길 바랐고 실상 그러한 권위만이 변화된 가치 속에서 그들이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보상이었다. -<우상의 눈물> 중에서-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서 학교폭력이 근절되지 않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교육이 비교육적이기 때문이다. 최근 학생부에 학교폭력 사실을 기재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는 것도 이런 우리 교육의 현실이다. 물론 찬성하는 쪽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현장이 교육이라는 것이다. 교육에 적용하는 기준은 여타 분야의 그것과는 달라야 한다. 왜? 말 그대로 교육이기 때문이다. 처벌이 능사라면 굳이 '교육'이라는 말을 쓸 하등의 이유가 없다.

 

소설 속에서 기표는 철저한 악의 화신이자 학교폭력의 가해자다. 잔인하고 교활하다. 그렇다고 기표의 잔인하고 교활한 성격에 대해 고민하는 이는 누구도 없다. 그저 기표를 추방하는 데만 혈안이 돼 있다. 기표에게 담배 지짐질까지 당했던 주인공 나만이 기표의 차가운 얼굴이 감추고 있는 따뜻함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할 뿐이다. 새 담임이 된 김 선생은 제적 위기를 교묘하게 넘기며 버티고 있는 기표의 힘을 빼는 데만 온통 열중하고 있다. 공동체를 위해서 한 명의 희생은 당연하다는 식이다. 그 어디에도 교육적인 면모는 보이지 않는다. 

 

"이제부터 육십육 명이 운명을 함께하는 역사적 출항을 선언한다.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단 한 사람의 낙오자나 이탈자가 없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아울러 이 시간 분명히 밝혀둘 것은 우리들의 항해를 방해하는 자, 배의 순탄한 진로를 헛갈리게 하는 놈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나무를 전정할 때 역행 가지를 잘라버려야 하듯 여러분의 항해에 역행하는 놈은 여러분 스스로가 엄단할 수 있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일 년간의 일사분란한 항해를 위해서는 서로 사랑과 신뢰로써 반을 하나로 결속하는 슬기를 보이는 일이다." -<우상의 눈물> 중에서-

 

당연히 기표를 염두에 둔 말이다. 그러나 담임은 자율이라는 말로 자신의 비교육적인 음모를 숨기려 한다. 

 

"고삐는 여러분 손에 쥐어져 있다.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그 고삐를 당겨 여러분 스스로를 제어주기 바란다. 내가 가장 우려하는 바는 여러분 스스로가 내 손에 그 고삐를 쥐여주는 일이다. 나는 자율이라는 낱말을 좋아한다." -<우상의 눈물> 중에서-

 

담임에 동조하며 위선적인 행태를 보인 이가 바로 반장 형우다. 형우는 기표에 대한 적대감을 감춘 채 오직 우의와 신뢰의 말로 기표를 미화하곤 한다. 담임과 형우의 속셈은 단 한가지다. 기표의 힘을 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담임과 형우의 의도를 간파하고 있다. 담임이 기표를 부반장으로 임명하려 할 때 "선생님, 기표 한 개인을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기표의 힘을 빼어 반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까?"라며 담임을 당황스럽게 하기도 하고 형우가 기표의 유급을 막기 위해 반 차원의 부정행위를 주도할 때도 "누구를 위해서 그렇게 하자는 거냐? 기표냐, 아니면 우리들 자신이냐?"라는 말로 담임과 형위 위선적 행동에 일격을 가하기도 한다.

 

담임과 형우의 기표 힘 빼기는 결국 성공을 거둔 듯 한다. 기표를 돕자는 명분으로 담임과 형우는 기표의 궁핍한 가정사를 낱낱이 공개하고 반 학우들은 형우의 연설에 감동해 기표를 돕는데 십시일반으로 나선다. 형우가 주도한 반 아이들의 이런 미담은 신문에 실리기도 하고 급기야는 그 미담이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한다. 기표가 자존심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으리라는 짐작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합법적인 권력 앞에 문제아, 악의 화신 기표는 완전히 제압당하고 만 것이다. 우리 교육현장에서 학교폭력의 근절방안이라고 내놓는 대책들이 다 이런 식이다. 가해자를 격리시키거나 처벌하는 것. 어디에도 가해자 기표를 계도해서 공동체 속으로 편입시키려는 노력은 없다. 처벌과 격리로 학교폭력이 근절된다면 이미 우리네 교육현장은 늘 평화로운 상태가 유지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잠깐의 평화는 기표의 가출로 깨지고 만다. 이 장면에서 담임의 비교육적이고 위선적인 행태는 여지없이 고발되고 만다. 학교로 찾아온 기표 어머니를 내쫓듯 교무실에서 밀어낸 담임은 "이 망할 새끼가 끝까지 말썽이란 말이야.", "내일 천일영화사 사람들하곡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잖냐? 그런데 이 망할 새끼가……" 라며 그동안 형우를 대리인으로 내세운 자신의 행동이 문제아 기표를 바른 길로 인도하려는 교육적 목적이 전혀 없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다. 교육현장의 비교육적 행태가 폭로되는 순간 독자들에게 문제아이자 가해자인 기표가 연민의 대상이 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기표는 '무섭다. 나는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는 편지를 남기고 가출했다. 이로써 자신의 이야기가 영화화되는 행복한 꿈은 깨지고 말았을지언정 담임과 형우의 목표는 다른 형태로 이루어 진 것이다. 또 다른 기표가 나타나지 않는 한 이 반은 평화의 시대를 만끽하게 될지도 모른다. 과연 그럴까. 다시 학교로 돌아오는 날, 아니면 다른 곳에서 기표는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더 거친 폭력을 행사하고 다닐지도 모른다. 교육현장이 비교육적인 논의들로 가득 찰 때 학교폭력은 결코 근절되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학교폭력의 악순환은 교육의 의미를 망각한 지금의 교육이 겪어야 예정된 길인지도 모를 일이다. 교육이기 때문에 처벌이나 격리가 아닌 다른 대책을 강구해야 할 경우가 많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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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여강여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