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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한국언론은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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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는 왜 짖는가/송기숙/1983년

 

지난 5월16일 아침 조선일보의 인터넷판인 조선닷컴은 박원순 서울시장이 스승의 날 학생들 앞에서 학교 폭력을 일방적으로 교사 탓으로 돌린 발언이 적절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며 비판 기사를 내보냈다. 서울시는 즉각적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서울시는 조선닷컴이 보도한 박원순 시장의 스승의 날 발언은 명백히 사실과 전혀 다른 왜곡보도로 정정보도 요청을 포함해 가능한 모든 법적 조처를 강구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오후 조선닷컴이 해당 기사를 삭제함으로써 사태는 일단락됐다. 문제의 발언은 이랬다. 스승의 날인 15일 강남중학교를 방문한 박원순 시장은 한 학생이 학교폭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학교폭력 참 이해가 안가요. 그건 전적으로 성인들의 잘못이라고 저는 생각해요."라고 답변했다. 그러나 조선닷컴은 '성인'을 '선생님'으로 바꿔 기사화한 것이다. 이는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이 추진한 '학생인권조례'등 진보적 교육행정에 제동을 걸기위한 조선일보의 의도된 왜곡보도라고밖에 볼 수 없다.

 

 

한편 지난 7월에는 MBC노동조합이 170간의 파업을 중단하고 업무에 복귀했다. 그러나 김재철 사장을 중심으로 한 사측은 특정 프로그램의 작가를 교체하고 시사 프로그램을 폐지하는 등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을 멈추지 않고 있다. MBC노동조합의 장장 170일간에 걸친 파업은 이명박 정부 들어 노골적으로 진행된 언론탄압에 대해 숨죽이고 있던 현진 언론인들의 저항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정권이 출범하자마자 대대적인 언론탄압을 자행했던 이명박 정부는 지난 5년 동안 각종 국책사업을 독단적이고 독선적인 방식으로 진행시켜왔다. 이미 입에 재갈이 물린 한국언론은 그 사이 별다른 비판없이 정부의 나팔수 노릇만 해왔다. 결과는 참혹했다. 임기말에 와서야 이명박 정부가 언론없는(?) 대한민국에서 벌여온 각종 사업들은 봇물 터지듯 문제점들이 노출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언론의 진짜 얼굴은 무엇일까. 특히 한국언론은 권력과 자본의 피해자인가, 아니면 권력과 자본에 편승해 여론조작을 서슴치않는 가해자인가. 때로는 한 국가의 대통령 관련 기사에서 호칭을 생략한 채 '노무현'이라고만 쓴 언론의 당돌함과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는 권력의 탄압에 맞서 뉴스 데스크 대신 아스팔트를 선택한 언론을 보면서 언론 소비자들은 아연실색하고 당황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암울했던 시대 한국언론의 참상은 지금의 언론이 심장에 피가 나도록 새겨야 할 교훈이어야 하겠다. 송기숙의 소설 <개는 왜 짖는가>는 한국언론 역사상 가장 암울했던 시대인 1980년대 초 무기력한 어느 언론인의 자화상을 풍자와 해학으로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 영하는 한 때 한 달에 특종을 세 번이나 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 신문기자다. 그러나 요사이 영하는 무얼 꼬치꼬치 따지는 사람이 무작정 싫다. 특히 정치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사람은 질색이다. 음담패설이나 낚시, 분재, 등산 같은 이야기가 아니고 화제가 정치나 시국 이야기로 돌아가면 슬그머니 자리를 떠버리기 일쑤다. 출입처에 기삿거리가 생겨도 마치 산에 나무하러 간 게으른 머슴이 나무를 베어 대충대충 가든그려 지고 오듯, 건둥건둥 정이하여 부장 데스크에 던져버리는 것으로 하루 일을 끝내고 만다. 그래서 보지도 않는 신문을 넣고 부리나케 도망가는 신문배달 아이를 붙잡아 닦달하는 아내의 말에 머쓱해지기도 해서 비실 웃곤 한다. 

 

"모두가 판에 박은 듯이 똑같은 신문을 무엇 하러 세 가지나 보냔 말이야. 고양이도 낯짝이 있더라고 좀 염치가 있어야지. 한 번만 더 넣었다가는 가만두지 않을 테야." -<개는 왜 짖는가> 중에서-

 

영하가 새로 이사온 동네 통새암 거리에 죽치고 앉아 온간 동네 일에 오지랖 넓게 간여하는 다섯 명의 노인들이 여간 마뜩찮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영하는 왜 이렇게 무기력한 기자가 되었을까. 영하의 이런 행동은 소설이 발표될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알레고리(Allegory, 우의寓意)라 할 수 있다. 소설은 바로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의 탄압이 절정에 달했던 1980년 이후의 상황, 특히 시대의 양심이 되어야 할 언론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채 무기력증에 빠져있는 상황을 풍자한다. 

 

 

1980년 11월14일 신군부는 한국신문협회와 한국방송협회를 내세워 전국 신문 및 방송 통신사를 통폐합하는 한국언론계의 전반적인 구조개편을 내용으로 하는 '건전 언론 육성과 창달에 관한 결의문'을 채택하고 전국 64개 언론매체 가운데 45개사를 통폐합 대상으로 발표하고 일사천리로 밀어부쳐 그 해 12월1일부터 새로 개편된 언론구조가 출범하게 된다. 알다시피 언론통폐합은 언론사들의 자율을 가장한 신군부의 언론장악정책이었다. 영하의 무기력증은 바로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개는 왜 짖는가. 소설에서 가장 완벽한 웃음코드를 주는 대목이면서 억압된 시대적 상황과 언론의 현실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통새암거리를 장악하고 있는 민영감, 좁쌀영감, 굴때장군, 털보영감, 호적계장 등 다섯 명의 노인들 곁에는 다섯 마리의 개가 마치 파수라도 보듯 골목으로 드나드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다. 이 개들의 이름이 참 기가 막히다. 이토(한국침탈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 또칠이(노인들이 비윤리적인 인간으로 취급하고 있는 동네 청년), 인규(3.15 부정선거의 주범 최인규), 아민(시위군중을 향해 무차별 발포한 아프리카 우간다 독재자). 개가 짖는 행위는 사회 구석구석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의와 부정을 세상에 알리는 신호다. 한편 개 이름에 부정적인 인물들의 이름을 대입해 응징의 상징적 대상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당시 암울했던 시대적 상황은 분재와 탱자나무, 오동나무 등으로 형상화된다. 분재가 인위적으로 정돈된 그래서 자연의 질서와 조화에서 어긋난 탄압받는 시대의 상징이라면 탱자나무나 오동나무는 뻗고 싶은대로 가지를 뻗고 내리고 싶은대로 끝없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정상적인 사회를 보여준다. 비록 외부의 압력에 의해 무기력한 기자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지만 영하가 언론인으로서 가져야 할 시대의 양심은 오동나무에 붙어 거침없이 소리를 내지르는 매미와도 같아야 한다.

 

매미는 지상의 생애 1주일 혹은 3주일을 살려고 땅 속에서 7년 내지 17년을 유충으로 기다린다는 것이다. 적어도 7년에서 17년을 별러 태어나 7일을 살다 죽는, 그 7일로 응축된 매미의 생애가 이상한 감성을 불러왔다. 찌이 하는 울음소리가 단순한 곤충의 울음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 기나긴 기간을 땅 속에서 벼르고 별렀던 자신의 무슨 절실한 의지를 저렇게 단음으로 표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저 크고 우람한 소리는 그 짧은 생애 한순간 한순간을 아껴 내지르는 뭔가 그만큼 절실한 삶의 표출일 것이다. -<개는 왜 짖는가> 중에서-

 

 

통새암거리 노인들이 오동나무라면 자신은 분재에 불과하다는 자괴감. 매미처럼 단 일주일을 살더라도 열정적으로 기자로서의 본분을 다해야 할 기자정신. 그러나 1980년대 시대적 상황은 펜보다는 칼이 강한 시대였다. 복싱선수처럼 그로기 상태가 되어버린 듯 벽에 등을 기댄 주인공 영하와 분재 소나무에 실로 친친 감겨 죽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말매미의 모습을 소설 맨 마지막에 배치한 소설은 참혹했던 시대와 그 시대에 등불이 되지 못했던 언론의 참담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수레바퀴는 가파른 돌밭 비탈길도 힘겹지만 꾸역꾸역 넘어간다. 그리기 상태가 되어버린 언론이지만 맞으면 맞을수록 맷집은 세지는 법이다. 들불처럼 타올랐던 민주화 열기와 이후 들어선 민주정권을 거치는 과정에서 한국의 언론자유는 어느덧 선진국 수준으로 신장되었다. 비록 최근 몇 년 사이에 군사정권 못지않은 문민독재로 인해 잠시 추춤하고 있지만 역사의 물줄기는 결국 거침없이 흐르게 돼 있다. 

 

문제는 달라진 정치와 언론환경에서 언론 스스로 보여주는 비민주적 행태들이다. 한편으론 언론자유를 말하면서 다른 한 편에서는 언론자유를 이용해 언론 스스로가 권력화되고 있다.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사회를 재단하기 위해 언론자유를 악의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박원순 시장 관련 조선일보의 보도는 최근 언론의 권력화를 보여주는 아주 일부일 뿐이다. 자기검열을 통해 권력과 자본에 결탁해 또 하나의 권력을 꿈꾸고 있는 게 요즘 한국언론의 현실이다. 언론이 민주사회에서 해야 할 역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의미로 언론을 '4부'라고 하는데 한국 언론은 상징적 의미의 '4부'가 아닌 현실 권력으로서의 '4부'를 획책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대통령 선거가 있는 올해 특정정파와 특정인을 권력 전면에 내세워 언론권력을 휘두르기 위해 온갖 왜곡과 편파보도가 난무할 것이라는 것은 불보듯 뻔하다. 

 

'신문없는 정부보다 정부없는 신문을 택하겠다.'는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 미국제3대 대통령)의 이 말의 의미를 제대로 새기고 있는 언론이 몇이나 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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