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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공순이라 불렸던 우리네 엄마와 누이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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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기미 풍경/송기숙/1978년

 

1979년 8월9일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이 당시 야당이었던 신민당사로 몰려들었다. 수당도 받지 못한 채 하루에 14시간 이상을 일해야만 했던 이들이 요구한 것은 체불임금지급과 회사 정상화였다. 1960,70년대 가발제조업은 대표적인 노동집약적 산업으로 수출에 기반한 한국경제의 한 축을 형성했다. YH무역은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경기호황과 정부지원에 힘입어 급성장한 가발제조업체였다. 그러나 이 회사 설립자는 미국에 외화를 빼돌리고 무리한 사업확장을 하면서 1978년 제2차 석유파동의 직격탄을 맞게 되었다. 결국 YH무역은 노동자들을 대량해고하고 이듬해에는 회사 폐업공고까지 하게 된다. 하루 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게 된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이 기댈 곳은 당시 김영삼 전대통령이 총재로 있던 신민당뿐이었다. 8월11일 신민당사에 투입된 경찰에 의해 이들의 농성은 강제해산되었고 이 과정에서 건물옥상으로 올라갔던 김경숙이라는 노동자가 자살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러나 훗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의해 김경숙이 자살했다는 경찰의 발표는 거짓임이 드러났고 경찰의 진압과정에서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 신민당사의 경찰투입은 박정희 전대통령의 재가까지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은 전태일 열사 분신과 함께 한국 노동운동사의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뿐만 아니라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제명과 부마사태로 이어져  유신정권이 몰락하는 단초를 제공한 한국 현대사의 한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산업역군이라 미화하면서 노동자들을 탄압해왔던 박정희의 18년 독재가 처참한 종말을 맞이한 것은 어쩌면 예고된 미래였을지도 모른다.  

 

 

1978년 《한국문학》에 발표된 송기숙의 소설 <몽기미 풍경>은 '공순이'라는 이름으로 폄하되었던 그러나 한국경제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어느 여성 노동자의 이야기다. 그렇다고 노동소설은 아니다. 다만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여공 생활을 하던 주인공이 설날 귀향길에서 고향에 얽힌 추억을 떠올리며 노동자로서의 자신을 깨닫는 과정은 소극적이나마 노동소설로 분류할 수도 있겠다.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 사건도 이런 자각을 통해 권력과 자본의 무자비한 탄압을 인식하게 되지는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몽기미 풍경>은 1970년대 말 명절 귀향 풍경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소설은 주인공 순자가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여공 생활을 한 지 5년만에 처음으로 고향을 가기 위해 귀향 행렬에 끼여 목포행 열차를 타는 것으로 시작된다. '몽기미'는 목포 앞바다 어딘가에 있는 작은 섬이다. 순자는 열차 안에서 고향 친구 남분이를 만나게 되는데 둘의 서울살이와 성격은 사뭇 어긋나 보인다. 인형공장에 다니면서 한푼두푼 모아 생활하는 순자와 자칭 '주전자 운전'을 하는 술집 작부의 삶을 살고 있는 남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두 사람 모두 당시를 살았던 우리네 엄마요 누이라는 사실이다. 

 

순자가 열악한 노동환경을 깨닫는 데는 두가지 사건이 중첩되면서부터다. 고단한 타향살이에 한 모금 샘물과도 같은 고향. 5년 만에 가게 될 고향. 그러나 순자에게 몽기미는 지금 일가친척 하나 없는 부모님과 조상님의 묘만 있는 마음 속의 고향일 뿐이다. 5년 만에 찾는 죄스러움 때문일까 순자는 문득 어릴 적 어머니에게 들었던 집안 내력을 떠올린다. 순자네 집안은 증조 할아버지가 동학농민전쟁 당시 일본군에 쫓겨 제주도로 가다 거센 풍랑에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파도에 실려 정착한 곳이 바로 몽기미다. 아마도 증조 할아버지는 대쪽같은 성격이었나 보다. 그래서인지 아버지가 시원찮은 짓을 하면 할머니는 곧장 이런 말을 했단다. 

 

'너 그따위 짓 하고도 명절에 할아부지 묏등에 성묘 갈래? 그 양반이 묏등에서 벌떡 일어서실 거여.'

 

순자가 문득 어머니의 얘기를 떠올린 데는 공장에서 있었던 사건 때문이다. 공장에서 친하게 지내던 혜선이 노동조합을 조직하려고 할 때 순자를 포함한 대부분 노동자들은 혜선의 주장에 찬동하고 주먹을 불끈 쥐어보았지만 정작 혜선이 회사측 사람들에게 개 끌리듯 공장을 쫓겨날 때 순자는 공장 건물 뒤에 숨어서 이 광경을 구경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식모살이 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순자에게 어떻게 사는 게 올바른 삶인지를 가르쳐 준 언니인데....그 때 순자는 스스로를 배신자라고 생각했다. 어머니에게 들었던 증조 할아버지의 대쪽같은 성격과 자신의 비겁했던 경험을 통해 무엇이 옳은지 열악한 노동환경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어엿한 노동자로서 일한만큼의 대우를 못받는 원인에 대해 조금씩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공장 건물 뒤에 숨어 끌려가는 동료들을 바라보는 자신의 행위는 할머니가 말한 '그따위 짓'과 같은 것이기에.

 

파도는 저만치 시커먼 바다에서 꿈틀꿈틀 밀려와 바위에 부딪혀 허옇게 물보라를 일으키며 부서졌다. 이 파도에서 순자는 몽기미를 본 것 같았다. 몽기미의 가난과 바다에 빠져 죽은 명식이의 한숨과, 옛날 태풍에 몰살당한 동학농민군 아우성까지도 들려오는 것 같았다. 파도는 허연 이빨을 번득이며 순자와 남분이 발밑에서 무섭게 부서지고 있었다. -<몽기미 풍경> 중에서-

 

순자는 목포 선창에서 몽기미행 표 대신 기차역으로 돌아가 정읍행 기차표를 샀다. 정읍은 혜선의 고향이다. 순자가 앞으로 노동현실에 눈을 뜨고 노동운동에 투신할 것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순자에게 고향 몽기미는 더불어 사는 세상에 대한 꿈이기도 하지만 불의한 사회를 자각하게 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다분히 현실적이고 감각적이며 순간의 쾌락을 즐기며 사는 남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현실을 자각하든 그렇지 못하든 이 또한 우리가 가슴으로 보아야 할 우리네 일상의 하나일 것이다.

 

1970년대 열악한 노동현실의 원류를 멀리 동학농민전쟁에까지 확장하는 데는 역사소설에 특히 민중들의 투쟁의 역사에 천착한 소설을 써온 저자의 글쓰기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이는 곧 청산하지 못한 역사의 반복이라는 점에서 사회모순의 근원이 어디인가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기도 한다.

 

순자의 소박한 자각이 가슴을 울리는 것은 21세기 오늘의 현실 또한 소설 속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생활임금에도 훨씬 못 미치는 최저임금, 그나마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노동자가 수백만, 대학을 졸업해도 갈 곳이 없는 청년들, 한창 나이에 명퇴를 걱정해야 하는 가장들, 언제 해고될지 전전긍긍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어느 통계를 보니 우리나라 노동자의 노동조합 가입율은 OECD 국가 중 최하위 수준이라고 한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권력과 자본의 탄압이 그만큼 교묘하고 악랄해졌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바야흐로 선거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달콤한 말들의 향연이 펼쳐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들의 향연 속에 숨겨진 진실은 결국 하나다. 그 진실의 옥석을 제대로 가릴 수 있는 것은 크게 뜨고 있는 눈[目]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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