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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어떻게 사느냐에 관한 두 개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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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취당기(晩翠堂記)/김문수/1989년

 

지지송간반울울함만취(遲遲松澗畔鬱鬱含晩翠)

저 시냇가의 소나무는 더디고 더디게 자라지만 무성하고도 늦도록 푸르도다.

 

비파만취 오동조조(枇杷晩翠 梧桐早凋)

비파는 겨울철에도 푸른 잎이 변하지 않지만 오동나무는 그 잎이 일찍 시든다.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지조와 절개를 지키며 사는 삶.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물음에 사시사철 푸르름을 잃지않고 서 있는 소나무는 이런 삶과 이런 삶을 살았던 사람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해주는 소재가 되어왔다. 생소하긴 하지만 잎사귀와 열매가 비파(毖琶)라는 악기를 닮았다는 비파나무도 겨울에 꽃을 피우고 여름에 열매를 맺는 상록수라고 한다. 어쩌면 소나무보다 더한 지조와 절개의 상징물이 비파나무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여기 지조와 절개를 의미하는 이 옛글들에 대한 독보적인(?) 해석을 내린 이가 있다. 천자문에 나오는 '비파만취 오동조조'를 비파잎의 푸르름이 아닌 오동잎의 일찍 시듦을 한탄하고 있다는 해석인데 그 사연이 참 의미심장하다. 

 

 

어떻게 살 것인가

 

김문수의 소설 <만취당기>는 '만취당'이라는 당호를 새긴 편액이 걸려있던 옛집을 찾아나선 주인공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오랜 세월 쌓이고 쌓인 아버지와의 갈등을 해소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살짝살짝 내비치는 해학적 요소들은 그릇된 욕망에 대한 가벼운 풍자쯤으로 생각하면 되지싶다. '비파만취 오동조조'를 두고 독보적인 해석을 내린 이는 바로 아버지다. 주인공인 나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어릴 때에는 늘 술에 취해있던 아버지 때문에 '만취당(晩翠堂)'이 '만취당(滿醉堂)'이 아니냐고 해서 종아리에 피가 맺히도록 매를 맞아야 했는데 세상물정 다 아는 나이가 되어 아버지에게 들은 '만취당'의 의미가 고작 '시류에 편승해서라도 명예와 권력을 지켜야 한다'니 좋아하는 그림까지 접고 아버지의 뜻에 따랐던 주인공으로서는 이만저만한 충격이 아니었을 것이다.

 

누구보다도 집안 대대로 내려온 '만취당'의 내력에 대해 잘 알고 있을 아버지가 왜 이런 엉뚱한 해석으로 나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유교적 관습에 얽매어있는 아버지의 성공에 대한 집착 때문일 것이다. 세 명의 정승이 난다는 '만취당'. 윗 대(代)에서 두 명의 정승이 났으니 현재 행정고시에 합격해 고위공직자로 일하고 있는 아들(나)이 남은 하나의 정승 자리 주인이 될 것임이 분명한 상황에서 쉬 욕망을 벗어던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 하나는 많은 부모들이 자식의 성공을 통해 느끼고자 하는 대리만족이나 보상심리의 표현일 것이다. 아버지 또한 어릴 적부터 남은 하나의 정승 자리 주인으로 온집안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자랐으나 불의의 사고로 그 꿈이 허망하게 무너져 말았으니 나의 성공은 아버지의 그것과 동일시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인공 내가 정작 생각하는 삶이란 성공보다는, 즉 시류에 편승해 정승 자리에 오르는 것보다는 겨울에 꽃을 피우고 여름에 열매를 맺는 비파나무처럼 변하지 않는 지조와 절조를 지키며 사는 것이다. 비록 생활이 조금은 비루할지라도....저자에게 주인공 '나'가 지향하는 삶은 1980년대 기나긴 독재정권과의 투쟁과 그 결실로 얻은 민주화의 과정에서 때로는 억압에 못이겨 때로는 투쟁의 대상이 상실된 상황 속에서 우후죽순 생겨난 변절자들에게 보내는 충고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만취당'의 의미마저 자기 합리화로 왜곡해버린 아버지와 나의 갈등을 조금은 유쾌한 방식으로 해결해 준다. 겉으로는 아버지의 뜻에 따르되 나는 그런 아버지를 이용해(?) 내가 지켜온 삶의 태도를 그대로 유지해 나갈 것이다. 이런 게 바로 윈윈전략이라는 것일 게다.

 

나는 옳다구나 싶어 속으로 쾌재를 올렸다. 썩은 물에서 하루 빨리 빠져 나올 수 있는 기회야. 끝까지 싸워보는 거야. 그러다 모가질 당하면 구멍가게라도 차리는 거야. 감투 때문에 썩은 물을 버리지 못하면 내 인생이 썩는 거야. 만취당 편액을 간판으로 내걸고 술장사라도 하는 게 낫지. 만취당 주점이라. 거 참 근사하구나! -<만취당기> 중에서-

 

무자비한 개발논리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고향

 

한편 소설 <만취당기>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유일한 주제로 삼기에는 소설 중간중간 삽입된 설정들이 결코 무의미하게 스쳐가지 않는다. 아버지의 '만취당'에 대한 집착이 명예와 권력을 향한 그것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은 '만취당'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너럭바위에 올라앉아 나눈 아들과의 대화에서 살짝 엿볼 수 있다.

 

"얘야, 난 어떻게 죽어야 하니? 선조 대대로 물려온 집을 지키지 못했으니..."

"이제 그만 잊어버리세요. 나라에서 하는 사업을 개인의 힘으로 어떻게 막습니까!"

"아무리 나라에서 하는 일이지만 저 명당에 공장을 세우다니..."

"이제 그만 잊으시라니까요."

 

아버지가 '만취당'을 통해 찾고자 하는 것은 고향일지도 모른다. 그 고향은 삶의 궤적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적 공간이 아니라 무자비하게 진행돼온 개발논리에 사라지고 잃어가는 것에 대한 인간 본연의 안식처로서의 고향이다. '만취당' 자리에 농공단지가 들어서게 되지만 정작 '만취당'의 역사적, 문화재적 가치는 고려대상이 되지 않는다. 일방적인 개발논리 속에 사람과 그 사람이 딛고 서있는 땅은 무가치한 것으로 폄하되고 만다. 주인공 '나'가 기차에서 우연히 합석하게 된 청년과의 대화는 개발논리에 속에 빚어진 인간성 상실의 현실을 가슴 뭉클하게 보여준다. 플라스틱 공장에 다니면서 포스겐 가스 때문에 폐수종에 걸린 청년의 이야기...

 

"저런...산재보험에는 들었었나요?"

"들긴 들었었지요. 그래 산재보험의 혜택도 받았고 생계보조금이라는 것도 탔지요. 그러나 병원에서 산재보험 환잘 어떻게 취급하는지 압니까? 또 생계보조금이라는 것은 병아리 오줌만도 못하다 이겁니다. 아십니까?"

"아니, 다 태우고 끈 거요. 그러나저러나 이제 완치가 됐나요?"

"완치요? 전 병원생활에 넌덜머리가 났습니다. 아니, 병원도 병원이지만 서울이라는 데가 죽도록 싫어졌다 이겁니다."

 

주인공 '나'의 어머니도 죽기 전까지 유리공장에 다녔었다. 그로부터 칠 년째 되는 해부터 거품섞인 가래와 호흡곤란으로 고생했다. 병명도 몰랐다. 어머니 뿐이 아니었다. 다른 공원들도 그런 증상으로 공장을 그만두고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공장측에는 자신의 그런 증상을 숨겨왔다. 알려지게 되면 목이 잘릴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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