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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2.10 '국가가 나에게 해준 게 뭐 있어' (44)

 

[20세기 한국소설] 중 채만식의 『논 이야기』/「협동」(1946.10)/창비사 펴냄

파출소 한 켠 긴 의자에는 늘 한 남자가 자고 있다. 넥타이는 반쯤 풀어져 있고 양복 윗도리는 의자에 걸쳐져 있으며 흰색 와이셔츠는 바지 밖으로 삐져나와 추레하기 짝이 없다. 신문지로 경찰서 아니 스튜디오의 환한 조명을 가리고 자고 있는 이 남자. 그도 평범한 늑대인지라 여우의 향기에 벌떡 일어나 방청객을 향해 사자후(?)를 토해낸다.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국가가 나한테 해준 게 뭐 있어

 

방청객들은 박수를 넘어 열광적인 환호로 이 술취한 남자의 등장을 맞이해 준다. 많은 논란 끝에 폐지되었던 KBS <개그 콘서트> ‘나를 술푸게 하는 세상코너에서 박성광은 이렇게 세상을 향해 소리쳤다. 방청객들과 시청자들은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늘 술에 쩔어 사는 이 남자를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었다. 이 남자를 술푸게 하는 슬픈 세상을 알기에 술 깬 박성광은 매력이 없었다. 그러나 늘 조마조마했다. 결국 연예인 출신 문화부 장관에게 한 방 먹었고 이런저런 해명 끝에 이 술취한 남자는 어느 날 브라운관 너머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우리는 국가라는 테두리 안에서 적지 않은 혜택을 받으며 살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술 취한 남자의 외침에 환호성을 지르며 열광했다. 왜 그랬을까? 그 답은 이 코너가 사라지면서 난무했던 각종 논란과 소문들에서 찾을 수 있다.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알만한 사람은 다 알거라 믿는다. 국가는 한 명의 우매한 지도자와 그를 따르는 졸개들에 의해 늘 권력으로 군림한다. 소위 말하는 국가 권력이다.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라는 책의 저자 더글라스 러미스 교수에 따르면 국가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독점적 권리를 부여한 결과로 국가 권력의 남용이 발생했다고 한다. 또 최근 100년 사이 국가 권력에 의해 희생된 사람만 2억 명이 넘는다고 한다.

 

채만식의 소설 『논 이야기』가 주목하는 대상이 바로 국가 권력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1945년 해방 전후의 어느 농촌 마을이다. 국가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시대적 배경이 채만식에게는 국가를 풍자하는 소재로 사용되고 있으니 역시 풍자소설의 대가다운 면모가 짙게 느껴지는 소설이다. 물론 저자는 주인공 한생원의 얄팍함도 그대로 두고 보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채만식이 풍자의 칼날을 들이대고 있는 국가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건 국가 권력의 모든 부조리를 보여주고 있는 현 세태와 무관하지 않다.

 

독립?

신통할 것이 없었다.

독립이 되기로서니, 가난뱅이 농투성이가 별안간 나으리 주사 될 리 만무하였다. 가난뱅이 농투성이가 남의 세토(소작) 얻어 비지땀 흘려가면서 일 년 농사지어 절반도 넘는 도지(소작료) 물고 나머지로 굶으며 먹으며 연명이나 하여가기는 독립이 되거나 말거나 매양 일반일 터이었다. -『논 이야기』 중에서-

 

해방의 환희로 들떠 있는 와중에 한생원에게 나라를 도로 찾는다는 것이 그렇게 기쁨일 수 없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니 그에게 독립은 구한국(구한말) 시절로 돌아가는 것, 그 이상 그 이하의 의미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친일파였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저 농사로 삶을 꾸려나가고 있는 이 땅의 평범한 농민이었다. 국가적 기쁨을 공유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그의 허황되고 합리적이지 못한 태도에 마냥 비난만 할 것인가!

 

한생원의 변명을 들어보자.

 

한생원네는 그렇게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먹고 사는 데는 그다지 어려움이 없었다. 아버지때 가지고 있던 열세마지기와 일곱 마지기의 땅. 품삯 받아 푼푼이 모으고 악의악식하면서 모은 돈으로 마련한 피와 땀이 어린 땅이었다. 그러나 갑오농민운동 당시 열세 마지기의 땅을 빼앗기고 말았다. 동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동헌에 끌려가 고문을 당해 정강이 살이 으깨지고 뼈가 아스러진 아버지 한태수를 빼내기 위해서였다. 물론 한태수는 동학에 가담한 일이 없었다. 이런 한생원에게 경술년 일본의 조선 합방은 그리 원통해 할 일이 아니었다.

 

그깟 놈의 나라, 시언히 잘 망했지” -『논 이야기』 중에서-

 

그러나 논 일곱 마지기로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남의 세토를 얻어 보충해야만 했다. 아버지와 달리 좀 허황하고 헤펐던 한생원에게 재산이 늘리 만무했다. 오히려 고리의 소작료로 빚은 늘어만 가고 생활은 궁피해져만 갔다. 더 꼼짝할 도리가 없어 논을 팔려고 하던 차에 일본인 길천이 비싼 값에 땅을 사들이고 있다는 소문에 귀가 번쩍 뜨여 논 일곱 마지기를 28원에 팔고 말았다. 세상이 뜻대로 되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허황된 꿈만 꾸고 있던 한생원에게 남은 건 더 궁핍해진 생활 뿐이었다.

 

그리고 해방이 되었다. 길천이 조선에 있는 땅을 버리고 일본으로 도망갔으니 당연 일곱 마지기 논은 한생원 땅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이 땅은 이미 국가의 소유로 넘어가 있었다. 제 땅을 다시 찾을래도 돈이 있어야 했다.

 

나라가 다 무어 말라비틀어진 거야? 나라 명색이 내게 무얼 해준 게 있길래. 이번엔 일인이 내놓구 가는 내 땅을 저이가 팔아먹으려구 들어? 그게 나라야?” -『논 이야기』 중에서-

 

한 편의 농민 수탈사를 보는 듯 하다. 한생원에게 아니 채만식에게 구한말, 일제 그리고 해방 후 국가는 권력의 주인만 바뀌었을 뿐 백성들에게는 다 도적놈 그 뿐이다. 채만식은 풍자적이고 냉소적인 언어로 국가 권력의 불합리를 비판하고 있다. 한생원의 허장성세가 국가 권력의 비열함에 가려진 듯 하나 한생원에게 돌을 던질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독립됐다고 했을 제, , 만세 안 부르기 잘 했지." -『논 이야기』 중에서-

 

지금도 국가 권력은 무소불위의 칼을 휘두르면서 백성들의 눈물은 마를 날이 없고 백성들이 딛고 서 있는 이 땅은 파헤쳐지고 신음하고 있다. 술 취한 그 남자의 주정이 그립다. 나를 술푸게 하는 세상이다.

*집은 책으로 채우고 화원은 꽃으로 메꾸어라*

Posted by 사용자 여강여호 트랙백 0 : 댓글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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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addr | edit/del | reply 탐독 2011.02.10 10:43

    국가권력이 희생당한 사람이 100년동안 2억명이라는 충격입니다. 아직도 이런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3. addr | edit/del | reply Favicon of http://blog.daum.net/parismadame BlogIcon 파리아줌마 2011.02.10 10:53

    차라리 우리가 국가에게 해준게 많죠.
    여러모로요,,더이상은 해주지 말아야지요.
    그게 서로를 위한것이겠죠..

  4. addr | edit/del | reply Favicon of http://www.hjstory.net BlogIcon HJ 2011.02.10 11:03

    예나 지금이나.. 국가 권력이라는 것은 속성이 변하지 않는가봐요..
    잘 보고 갑니다.

  5. addr | edit/del | reply Favicon of https://daddymoo.tistory.com BlogIcon 아빠소 2011.02.10 11:13 신고

    이제 이정도 수준의 글로도 불안함에 쌓이네요..조마조마합니다..

  6. addr | edit/del | reply Favicon of http://belgebwit.tistory.com BlogIcon 벨제뷰트홀릭 2011.02.10 12:21 신고

    국가권력을 너무 휘둘러서 문제입니다-_-

  7. addr | edit/del | reply Favicon of https://1evergreen.tistory.com BlogIcon ♣에버그린♣ 2011.02.10 12:40 신고

    진짜 국가가 나에게 해준게 무얼까? 문득문득 생각하게 됩니다 요즘엔~

  8. addr | edit/del | reply Favicon of http://1 BlogIcon 박씨아저씨 2011.02.10 12:42

    아마 유신시절에는 저런 프로가 있었더라면 방송금지 되었을겁니다~ㅎㅎㅎ

  9. addr | edit/del | reply Favicon of http://ㅣleebh123 BlogIcon 황금마차농원 2011.02.10 13:24

    맞구먼유 국가가 생색내는데는 앞장서서 세금다쓰고
    서민들 복지에는 쓰는둥마는둥 허는것이 눈으로 보일정도 이군먼유.

  10. addr | edit/del | reply Favicon of https://mijuhosi.tistory.com BlogIcon 쿤다다다 2011.02.10 13:31 신고

    지금도 그런 생각듭니다. 국가가 해준 게 뭐지? 너도나도 한국 싫다고 다른 나라로 떠나가는 요즘의 현실도 어찌보면 국가에 대한 원망 아니겠어요? 한생원의 그릇된 사고에 호통을 쳐야겠다고 생각하다가도 측은함이 밀려오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11. addr | edit/del | reply 카프 2011.02.10 14:27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12. addr | edit/del | reply Favicon of http://hppos.tistory.com BlogIcon 해피포스 2011.02.10 16:41 신고

    여강여호님의 글을 보면서 책에 재미를 느끼게 되었네요^^

  13. addr | edit/del | reply Favicon of https://ddella.tistory.com BlogIcon 2011.02.10 17:47 신고

    생활고로 세상을 떠난 최작가의 죽음을 본 이후라 왠지 씁슬하네요.
    잘보고 갑니다...^^

  14. addr | edit/del | reply Favicon of http://blog.daum.net/land2005/ BlogIcon 강산 2011.02.10 18:51

    참 많은 것을 느끼게 하는 소설입니다. 이 땅 민초들의 힘든 생활고가 단지 그때만의 일일지...
    이 땅의 서민들도 살만한 세상은 어떤 것일까요?

  15. addr | edit/del | reply Favicon of http://newron1972.tistory.com BlogIcon newron1972 2011.02.10 19:07 신고

    책을 많이 좋아 하시나보네염 ..

  16. addr | edit/del | reply 탐독 2011.02.10 20:15

    농사를 짓다보면 가장 정직하다는 것을 압니다.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지요. 우리 사회에서 가장 대접받아야 할 분들이 농민들인데,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 동네는 4월초가 되면 못자리를 합니다. 빨리 그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17. addr | edit/del | reply Favicon of https://yeokgi.tistory.com BlogIcon 배꼽찾기 2011.02.10 22:03 신고

    나를 술푸게 하는세상 코너 정말 재밌게 보고 있었는데...
    어느날 보니까 안하더라구요
    그래서 코너가 끝났나 했거든요
    여강여호님 글을 읽고 보니 이유가 있었군요...씁쓸하네요.


    책이랑 빨리 친해져야 되는데...
    저는 왜 책만 보면 졸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여강여호님 글에 공감하는 그날이 빨리 오길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18. addr | edit/del | reply 음... 그치만... 2011.02.11 14:08

    아무래도 내가... 아니, 당사자(?)가 어디의 부분집합인지가 중요하지 않을까 싶네요!
    비록, 위치한 곳은 변함이 없으나, 어디의 부분인지에 따라 [나비효과]로 미래가 완전 달라질 수 있을테니...

    비록, 문학작품속의 한태수일 뿐이지만,
    지금 이 나라의 우매한(?) 민중들 의식을 보는 거 같아 참... 답답한 맘 금할 길이 없네요!
    지금도 이 나랄 야금야금 먹어치우고 있는 일본인데... ㅠ.ㅠ

    • addr | edit/del BlogIcon 어처구니 2015.06.13 12:18

      우매한 민중. ㅋㅋㅋㅋ 그 어느때도 그랬지만. 민중은 우매할 수밖에 없습니다. 윗 댜리라는 작자들은 민중들이 현명한 것을 원하지 않거든요. 민중이 우매해야 원하는 곳으로 이끌고 민중들이 우매해야 그들의 눈을 가리고 배를 채울 테니까요. 민중들이 현명해 지려면 지금의 국가를 뒤엎어야 할겁니다. 아니. 현명했다면 벌써 뒤엎었겠죠.

  19. addr | edit/del | reply 2011.02.13 05:50

    비밀댓글입니다

  20. addr | edit/del | reply Favicon of http://lawncarevancouver.org BlogIcon lawn care vancouver 2011.10.07 03:36

    많이 많이 사용하는 라인업
    되었으면 좋겠어요

  21.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어처구니 2015.06.13 12:22

    국권침탈? 애초에 가진게 없는 사람들은 국가가 침찰되건 말건 상관 없는 이야기죠. 어차피 나라가 어찌되건 그들의 삶은 변함 없는거니까. 애국심을 세뇌라도 시키는 모양이지만. 그런다고 없는 애국심이 생길 일도 아니고. 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