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영웅 헤라클레스의 후손들, 헤라클레이다이

2026. 2. 16. 07:00세계의 신들

헤라클리데스(Heraclides) 또는 헤라클레이다이(Heracleidae, 헤라클레스의 가문)는 영웅 헤라클레스의 후손으로 헤라클레스의 자식들과 그 자식들의 후손들을 일컬었다. 가장 유명한 헤라클레이다이로는 그리스를 침략한 힐로스와 트로이 전쟁에 참여했던 텔레포스, 틀레폴레모스 등이 있었다. 헤라클레스가 죽은 후 헤라클레이다이는 헤라클레스의 오랜 숙적 에우리스테우스에 의해 거의 전멸당했다. 결국 그리스에서 쫓겨난 헤라클레이다이는 막강한 군대를 이끌고 미케네, 스파르타, 아르고스 등 여러 도시를 정복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헤라클레이다이의 펠로폰네소스 정복 신화가 실제 역사적 사건인 ‘도리아의 침공’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리스 역사 전반에 걸쳐 스파르타와 같은 도시의 통치자들은 헤라클레스를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했다.

 

헤라의 저주로 광기에 사로잡힌 헤라클레스.

 

헤라클레스의 수많은 결혼, 불륜 그리고 희롱은 수많은 자식을 만들었는데 고대 신화 자료에 따르면 그의 자식들이 100명이 넘는다고 한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에 따르면 헤라클레스의 다산은 테스피오스의 딸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신화에 따르면 보이오티아의 도시 테스피아이의 왕 테스피오스는 자신의 땅을 황폐화시키던 무시무시한 키타이론의 사자를 사냥한 보상으로 헤라클레스가 50명의 딸들과 동침하도록 허락했다. 이 50명의 여자들은 각각 헤라클레스와 최소 한 명의 아들을 낳았다. 헤라클레스는 이후 적어도 두 번의 결혼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첫 번째는 테베 왕 크레온의 딸 메가라와, 두 번째는 칼리돈 왕 오이네우스의 딸 데이아네이라와였다. 두 번의 결혼으로 헤라클레스는 더 많은 자식을 낳았다. 헤라클레스는 헤라 여신의 저주에 미쳐 메가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을 모두 죽였지만 데이아네이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은 살아남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자식이 바로 첫째 아들 힐로스였다.

 

헤라클레스는 다른 많은 여자들과도 자식을 두었다. 리디아 여왕 옴팔레와 여신 헤베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도 있었다. 헤베는 헤라클레스가 죽은 후 신이 된 후 맞이한 아내였다. 헤라클레스의 자식들 중 일부는 그 자체로 유명했다. 예를 들어 틀레폴레모스는 로도스 섬의 왕이 되었고 트로이 전쟁에서 그리스인들과 싸웠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따르면 그는 제우스의 아들이자 트로이의 가장 강력한 동맹 중 한 명인 사르페돈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테게아 공주 아우게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헤라클레스의 아들 텔레포스는 서부 아나톨리아 미시아인의 통치자가 되었다. 한 신화에 따르면 그리스인들은 트로이 전쟁에 참전하던 중 실수로 텔레포스의 왕국을 공격했다. 텔레포스는 아킬레우스에게 부상을 입었지만 나중에 그리스군을 트로이로 인도하는 데 도움을 준 대가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헤라클레이다이는 헤라클레스의 죽음 이후 겪은 박해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헤라클레스에게 유명한 열 두 가지 과업을 부여했던 미케네의 왕 에우리스테우스는 특히 헤라클레스의 후손들을 모두 죽이기로 결심했다. 헤라클레스와 에우리스테우스 사이의 적대감은 사실 둘 중 누구도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되었다. 헤라클레스의 아버지 제우스는 원래 헤라클레스를 미케네의 왕으로 삼으려 했지만 남편의 사생아를 질투한 헤라의 계략으로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헤라클레스의 사촌 중 한 명인 에우리스테우스가 대신 왕이 되었다. 이후 헤라는 에우리스테우스가 헤라클레스를 위해 불가능한 과업을 고안하도록 도왔고 그가 그 과업을 완수하는 동안 목숨을 잃기를 바랐다. 헤라클레스가 죽자 에우리스테우스는 영웅의 자식들이 언젠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 할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는 헤라클레스의 혈통을 완전히 없애고자 했다. 수년간 적으로부터 도망친 헤라클레이다이는 마침내 아테네에 피난처를 얻었다. 아테네인들이 헤라클레이다이의 항복을 거부하자 에우리스테우스는 그들을 공격했지만 결국 패배하여 전사했다.

 

힐로스를 안고 있는 헤라클레스.

 

에우리스테우스가 패배한 후 힐로스(헤라클레스와 그의 두 번째 아내 데이아네이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는 헤라클레이다이를 이끌고 펠로폰네소스를 침략했다. 아버지가 미케네에서 펠로폰네소스를 통치할 운명이었기에 헤라클레이다이는 이 영토를 자신들의 선천적 권리로 여겼다. 실제로 그들의 침략은 종종 ‘귀환’이라고 불렸다. 헤라클레이다이는 처음에는 많은 도시를 정복하며 성공을 거두었지만 곧 역병으로 인해 그들의 군대는 황폐해졌다. 힐로스는 신탁을 통해 그들이 적절한 시기에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역병이 발생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델포이의 신탁에 따르면 헤라클레이다이는 펠로폰네소스로 돌아가기 전에 ‘세 번째 수확’을 기다려야 했다. 힐로스는 ‘세 번째 수확’이 3년을 의미한다고 믿었고 할당된 시간을 기다린 후 다시 펠로폰네소스를 침략했다. 그러나 헤라클레이다이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그리스 본토를 연결하는 좁은 땅, 코린트 지협에서 패배했다. 힐로스 자신도 전투에서 전사했고 헤라클레이다이는 50년 이상 북쪽으로 유배되었다.

 

힐로스의 침공 이후 두 차례의 공세가 더 실패로 돌아갔다. 첫 번째는 힐로스의 아들 클레오다이오스가 지휘했고 두 번째는 클레오다이오스의 아들 아리스토마코스가 지휘했다. 클레오다이오스와 아리스토마코스 모두 전투에서 전사했고 그들의 군대는 참패했다. 마침내 아리스토마코스의 세 아들 테메노스, 크레스폰테스, 아리스토데모스는 다시 델포이에 문의했다. 이번에는 ‘세 번째 수확’이 3년이 아니라 3대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공격할 곳에 대한 더 명확한 지시도 받았다. 코린트 지협이 아니라 펠로폰네소스 반도 서쪽에 있는 리움 해협이었다. 헤라클레이다이가 침략을 준비하는 동안 아리스토마코스의 아들 중 한 명인 아리스토데모스가 전사했다. 그의 지휘권은 두 아들 에우리스테네스와 프로클레스에게 넘어갔다. 헤라클레이다이는 세 눈의 안내자를 만나야만 침략에 성공할 수 있다는 경고를 받았다. 우연히 그들은 펠로폰네소스의 엘리스 왕국 출신으로 외눈박이 말을 타고 있던 옥실로스를 만났다. 그를 안내자로 삼아 헤라클레이다이는 다시 펠로폰네소스를 침공했다.

 

이어진 전투에서 헤라클레이다이는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다. 그들은 미케네의 왕 티사메노스(트로이 전쟁 당시 그리스군을 이끌었던 아가멤논의 손자)를 물리쳤다. 그러나 도리아족으로 알려진 북부 그리스 부족의 지도자이자 헤라클레이다이의 동맹이었던 팜필로스와 디마스는 침략 중에 전사했다. 결국 펠로폰네소스를 정복한 것은 헤라클레스의 증손자들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테메노스, 크레스폰테스 그리고 아리스토데모스의 두 아들(에우리스테네스와 프로클레스)은 펠로폰네소스를 어떻게 분할할지 결정하기 위해 제비뽑기를 했다. 테메노스는 아르고스와 아르골리스를, 크레스폰테스는 비옥한 메세니아를, 에우리스테네스와 프로클레스는 스파르타가 수도였던 라코니아를 차지했다. 그리스 역사 전반에 걸쳐 이 세 지역의 통치자들은 자신들의 혈통을 헤라클레스에서 이어받았다.

 

텔레포스를 안고 있는 헤라클레스.

 

19세기 역사가들은 ‘헤라클레스 가문의 귀환’ 신화가 북부 그리스 부족들이 중부 그리스로 이주한 실제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이주는 고대 그리스어의 특정 고전 이전 방언들이 중부 그리스 대부분 지역에서 대체된 이유를 설명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새로운 방언은 도리아 방언이라고 불렸고 이 이주는 도리아의 침공으로 불렸다. 약간의 상상력을 더하면 펠로폰네소스로 이주하여 정복한 도리아인들은 헤라클레이다이와 그들의 신화적인 정복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광범위한 연구 끝에 학자들은 도리아인의 대규모 침공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구체적인 고고학적 또는 역사적 증거는 없다고 결론지었다. 헤라클레이다이 신화는 여러 차례의 소규모 이주에 기반을 두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들의 정복 이야기에 실제로 영감을 준 것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헤라클레이다이는 리디아도 다스렸지만 모계와 혈통에 대해서는 출처마다 다르다. 헤라클레이다이는 헤라클레스와 이아르다노스(옴팔레의 아버지)의 여인의 후손이라는 데에는 널리 동의하지만 이 여인이 그의 딸인지 아니면 그의 저명한 딸인 옴팔레 여왕인지에 대해서는 출처가 다르다. 헤로도토스는 헤라클레스가 이아르다노스의 노예 소녀(헤로도토스의 기록에는 이름이 없으므로 옴팔레일 가능성이 있음)와 함께 이 왕조를 세웠다고 썼다. 이 기록에 따르면 이 왕조의 첫 번째 통치자는 아그론이라는 이름의 그들의 증손자였다. 아그론의 뒤를 이어 리디아는 505년 동안 22대에 걸쳐 헤라클레이다이의 왕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이 왕조의 왕들 중에는 멜레스가 포함되었고 그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칸다울레스가 왕위에 올랐다. 칸다울레스는 관음증으로 악명을 떨쳤다. 그는 그의 하인 기게스에게 왕위를 찬탈당했는데 기게스는 메르므나드 왕조를 세웠다.

 

그러나 대부분의 다른 자료들은 리디아의 헤라클레이다이가 이아르다노스의 익명의 노예 소녀의 후손이 아니라 그의 딸 옴팔레의 후손이라고 말한다. 옴팔레는 헤라클레스를 1년 동안 노예로 부렸던 리디아의 여왕이었다. 그들의 로맨스는 성 역할의 역전으로 특징지어졌는데 옴팔레는 사회적, 성적 맥락 모두에서 남성적 역할을, 헤라클레스는 여성적 역할을 맡았다. 아폴로도로스는 리디아의 헤라클레이다이가 옴팔레와 헤라클레스의 아들 아겔라오스의 후손이며 아겔라오스는 후에 크로이소스의 조상이 되었다고 기록했다. 기원전 1세기경의 그리스 역사가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소스 또한 헤라클레스와 옴팔레가 에트루리아인의 시조인 티레노스와 같은 왕족의 자녀를 낳았다고 기록했다. 이는 헤라클레스에게 티르세노스라는 리디아 출신 아들이 있었다고 기록한 파우사니아스의 기록에서도 뒷받침될 수 있는데 이는 다른 문헌에서 티레노스의 변형으로 사용되었다. 기원전 5세기경의 그리스 역사가 리디아의 크산토스에 따르면 리디아의 헤라클레이다이는 헤라클레스와 옴팔레의 아들인 틸론에서 유래했으며 틸로니다이라고 불렸다. 틸론은 헤라클레스로 해석되는 토착 아나톨리아 신인 틸로스의 변형이었다.

 

스파르타에서 헤라클레이다이는 아기아드 왕조와 에우리폰티드 왕조라는 두 왕조를 공동 통치했다. 리산드로스와 같은 다른 스파르타인들도 헤라클레스 후손이었다고 한다. 코린트에서는 헤라클레이다이가 귀족 혁명 이전에 바키아다에 왕조로 통치했으며 이 혁명으로 바키아드 귀족이 권력을 잡았다. 헤라클레스의 후손인 테메노스는 아르고스의 초대 왕이었으며 후에 유명한 폭군 페이돈이 아르고스의 왕이 되었다.

 

 

테메노스의 헤라클레이다이는 아르고스의 왕이 된 후 마케도니아를 통치하게 되었다. 이것이 마케도니아의 아르게아스 왕조였다. 헤라클레스의 후손인 테메노스가 마케도니아에 세웠는데 그는 아르고스를 떠나 마케도니아에 정착하여 자신의 왕국을 세웠다. 그러나 테메노스가 어느 테메노스 가문의 마케도니아 분가를 세웠는지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의견이 다르다.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는 마케도니아 평원을 정복하고 요새를 건설하여 왕국을 발전시킨 페르디카스가 왕조를 세웠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후대 사료에서는 아르게아스 왕조가 카라누스에 의해 마케도니아에 세워졌다고 한다. 기원전 4세기경의 그리스 역사가 펠라의 마르시아스에 따르면 카라노스는 단순히 마케도니아를 정복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먼저 델포이의 신탁으로부터 마케도니아를 정복하라는 예언을 받았고 따라서 그의 원정에는 신적인 정당성이 있었다.

 

아르게이드 왕조의 마케도니아 왕국은 헬레니즘 시대를 시작으로 알렉산더 대왕의 치세에 전 세계를 정복한 것으로 유명해졌다. 알렉산더의 아버지이자 선왕인 필리포스 2세의 치세에 아르게이드 왕조는 상마케도니아 전역으로 패권을 확장했고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를 제외하고 에게 해에서 가장 강력한 왕국이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필리포스의 그리스 정복을 이어갔고 이후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여 이집트와 인도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현대에 이르러 헤라클레스 가문의 혈통은 부르군트 왕가와 카스티야 왕조의 왕들이 주장해 왔다. 17세기 스페인 왕 펠리페 4세는 양가의 후손으로 화가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에게 부엔 레티로 궁전 장식의 일부로 헤라클레스를 묘사한 10점의 연작을 의뢰했다. 이 작품들은 그의 통치의 정당성을 우화한 것으로 여겨졌다.

 

헤라클레스의 자녀와 후손 중 소수는 영웅 숭배의 대상이었다. 예를 들어 틀레폴레모스는 로도스에서 중요한 정착지와 왕국의 창시자로 숭배되었고 텔레포스는 아나톨리아에서 영웅적인 영예를 누렸을 가능성이 높다. 헤라클레스의 비교적 어린 아들인 안티오코스는 아테네에서 도시 부족의 이름이 유래된 10명의 ‘동명의 영웅’ 중 한 명으로 존경받았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헤라클레스의 개별 후손에 대한 숭배는 그들의 강력한 조상에 대한 숭배에 비해 훨씬 덜 중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