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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誤字)/김형수/2012년

 

소설 제목보다는 수필 제목에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오자(誤字)'란 말 그대로 '잘못 쓰인 글자'를 말한다. 책을 읽는 사람이면 누구나 무수히 많은 글자들 속에 꼭꼭 숨어있는 '오자'를 발견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 때 당신은 어떤 감정을 느꼈는가? 아마도 책이라는 소름 끼치게 치밀한 권위로부터 자유로워진 해방감을 만끽했을지도 모른다. 도저히 다가갈 수 없을 것처럼 저자와 책의 완벽함이 구축해놓은 장벽이 비로소 무너지는 느낌같은 것 말이다. 한편 '오자' 하면 떠오르는 그리 멀지 않은 기억이 있다. 지난 4.11총선 당시 국회의원으로 변신한 어느 스포츠 스타가 박사논문 표절로 자격시비가 한창일 때 표절의 결정적 증거로 내놓은 자료가 바로 '오자'였다. 즉 오자만큼은 표절할 수 없었던 것이다. <조드>의 저자 김형수의 단편소설 <오자>는 이런 '오자'의 특성을 통해 우리사회에 만연한 권위의 실체에 대해 파헤치고 있다. '오자의 몸통이 그 자체로 보편성보다 개체성을 크게 갖고 있다'는 저자의 말처럼 한 시대를 풍미한 사상이나 이념, 관습이 가지는 보편적 권위(획일성으로써)는 하나의 신화가 되지만 그 신화를 깨뜨릴 수 있는 무기는 '오자' 즉 다양성(개체성의 사회적 함의로써)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 '오자'는 사람의 이름이기도 하고, 문장 속 잘못 쓰인 글자이기도 하다. 굳이 구분하자면 이렇지만 '오자'라는 인물은 문장 속 잘못 쓰인 글자인 '오자'처럼 모종의 체제인 세상의 보편적 권위에 해방감 내지 자유를 선사하는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다. 저자는 '오자'에 대해 '정의와 도덕과 양심에 입각하여, 마치 물에 던져진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기를 서슴지 않는 성품'이라고 소개한다. 그래서 그는 늘 일상의 안정을 흔들어왔다. 저자의 '오자'에 대한 설명에서 세상을 움직이는 권위 아니 보편적 권위에 의해 돌아가는 세상의 실체는 보다 자명해진다.

 

인격체를 지목해 오자니 탈자니 하는 게 옳다는 건 아니다. 사람들이 공유하는 세상 이미지의 밑바탕에는 한권의 책이 있다. 어떤 이는 팔만대장경쯤으로 알고, 어떤 이는 대한민국 상식백과로 알며, 어떤 이는 소설 변강쇠 같은 통속물로 알지라도 분명한 것은 모종의 체제를 가리켜 세상이라 한다는 것이다. 개중에는 자신의 존엄함을 '하나의 독자적인 정부'에 비유하는 독트린을 선포하기도 한다. 일개 자아의 무게가 체제의 크기와 맞먹는 영혼이 없는 건 아니지만 결국은 모두가 서로의 인질이며 일사불란한 세상 관계의 일원일 뿐이다. 오자 이야기는 그래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오자> 중에서-

 

 

그렇다면 '오자'에 의해 보기좋게 무너져버린 보편성 또는 보편적 권위란 무엇일까. 소설 속 표현대로 '소름 끼치게 치밀한 권위'라는 말이 좀 이해하기 어렵다면 겉으로는 다문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자세를 역설하면서 일상에서는 여전히 순혈주의의 악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입담꾼 정도로 비유하면 어떨까. 시류에 편승해 다수의 편에 서서 삶의 안락함을 누리고자 하는 지식인들이 보여주는 허세적, 허위적 삶의 태도를 저자는 모종의 체제로서 세상을 지배하는 권위로 정의하고 있다. 이런 모종의 체제 속에서 숨쉬기조차 힘든 사람들에게 '오자'는 구원투수와도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설정한 권위의 시대는 바로 이데올로기의 백가쟁명을 맞던 6월항쟁 이후의 서울 굴레방다리다. 혁명의 밀물이 열정과 반대되는 일체를 밀어버렸던 시대, 그 활극의 시대를 마음껏 휘저었던 사람들은 무사가 아니라 문사들이었다. 저마다 민주화 투쟁의 영웅담을 늘어놓던 시대, 목청이 크면 누구나 주인공이었고, 시대정신을 말할 수 있으면 누구나 혁명가였던 시대, 기라성같은 별똥들이 하도 많아 우열을 가릴 수 없었던 시대, 그 이념의 거리를 향유했던 건각들이 남겨놓은 거라곤 고작해야 분열이었고 군인이 다시 집권하는 들러리 역할뿐이었다. 그런 와중에 첫 작품이 베스트셀러에 올라 올챙이 시절도 없이 당당히 문제작가로 직행한 '오자'의 당선소감은 당시를 지배하고 있던 가식과 허위와 허세에 제대로 일침을 가한다. 

 

"지는 참말로 휴전선을 볼 때마다 똥을 싸고 싶습니더. 이기 다 우상 아인교. 반세기 동안이나 집단 무의식에 시달리고도 괘안십니꺼? 분단의식은 우리 삶 속에 정착되다 못해 점점 신성시되다가 어느 순간 신이 된 긴데, 인자 마 우상숭배를 중단하입시더." -<오자> 중에서-

 

한편 가식으로 포장된 보편적 권위가 이념이나 권력과 만나는 지점에서 폭력으로 둔갑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세상의 이치다. '오자'가 중국여행 중에 술기운에 두만강을 건너 북한으로 넘어간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 사건을 두고 월북인가 납치인가를 두고 온 세상이 시끄러워졌는데 어찌어찌해서 김포공항을 통해 돌아오던 날 입북 동기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오자'의 대답은 단순 명쾌했다.

 

"평소 북을 똑같은 조국이라고 생각했심더. 술을 마시자 너무 가고 싶었심더. 코앞에 있는데 못 갈 기 뭐 있노."

 

분단의 가치를 신성하게 받아들이고 있던 보편적 권위의 건각들에게는 신성한 분단의 가치가 코미디로 전락한 순간이었고 권위를 폭력의 근거로 삼은 권력은 그를 갖가지 이유로 '간첩'이라는 낙인을 찍고 말았다. 소설 속 설정이 왠지 낯익은 신문기사처럼 머릿 속을 맴돌았다. 아! 그랬다. 소설 속 '오자'는 <완전한 만남>의 작가 김하기였다. 저자에게 직접 들은 바 없어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읽는 내내 입가를 맴돌던 이름이었다. 1996년 김하기 작가는 가족들과 함께 중국여행을 하던 중 연길시 '금강원'이라는 식당을 나간 후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는 택시로 연길에서 두만강가에 도착해서 수영으로 강을 건너 두만강 부근의 한 주막에서 밤을 보낸 후 주막주인에게 북한당국에 신고해 줄 것을 부탁해서 북한군 국경경비대에 인되된 후 다시 남쪽으로 인계되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김하기 작가가 6월항쟁 20주년을 맞아 모 신문사에 발표한 기고문을 <오자>의 저자가 '오자'라는 인물의 기행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메세지를 보다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현대는 인간에게 물과 뭍에서도 잘 살아갈 수 있는 양서류의 문화를 요구한다. 목적과 이념이 없는 세계에서는 ‘적당한 편의주의’와 ‘효율적 방법론’이 행동의 척도가 될 수밖에 없다. 항쟁이 본래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형식적인 광장문화로 전락되는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그날의 타는 목마름과 뜨거운 기억은 지금 정치적 냉소주의와 허무주의로 대체되었다." -김하기 작가의 경향신문 기고문 중에서-

 

저자는 본래의 의미를 상실한 채 과거 민주화 투쟁경력을 맹목적 권위의 근거로 삼아 시류에 편승하려는 지식인 사회를 꼬집고 있는 것이다. 질서정연한 권위에로의 합류를 권유하지만 이미 그들이 말한 권위는 내용은 빠진 채 형식만 남은 허위와 가식과 허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저자는 이 신성한 보편적 권위를 망가뜨릴 '오자'의 출현을 간절히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자 한자 없는 팔만대장경 오천만 글자의 일원인 한반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오자를 발견하는 게 불편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반듯하게 줄을 서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책을 읽는 사람이면 누구나 오자를 보는 순간 소름 끼치는 치밀한 권위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나도 그랬고 친구들도 그랬다. 돌이켜보면, 모든 표절이 오자에서 드러난다. 오자는 표절할 수 없다. 그것은 오자의 몸통이 그 자체로 보편성보다 개체성을 크게 갖는 까닭이다. -<오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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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여강여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