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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국가정책에 무너지는 선량한 개인들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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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소/이문구/1970

 

한국 유기농업의 발상지인 경기도 양평군 두물머리의 유기농지 이전을 둘러싼 갈등이 3년 만에 해결됐다고 한다. 국토해양부와 농민 측이 유기농 하우스단지가 있던 두물머리를 생태학습장으로 조성하자는 종교계의 중재안을 받아들였다는데 못내 씁쓸한 여운이 가시지 않는 것은 일방통행식 국가정책의 폭력성과 그로 인해 파괴되어가는 선량한 개인들의 일상이 여론의 관심 저 편에 내몰리고 있는 현실 때문일 것이다다수의 행복이 민주주의가 존재하는 원칙이라지만 그 지고지순한 원칙보다는 다수의 행복을 가장한 위장 민주주의가 횡횡하는 현실에서 그것 때문에 소외받는 소수는 민주주의가 만들어낸 희생양인지 아니면 민주주의를 위한 거룩한 제물인지 혼란스러울 뿐이다

 

실제 두물머리 유기농지 이전을 둘러싼 갈등은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정부의 일방적인 4대강 사업 추진으로 양평 두물, 남양주시 진중, 광주시 귀여 등 3개 유기농 지구가 사업지에 포함되면서 경기도는 이곳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농민들을 근처 유기농 시범단지나 대체농지로 이전을 추진했다. 다만 두물머리 열한 곳 농가는 끝내 이전을 거부하며 국가를 상대로 힘겨운 투쟁을 이어왔다그나마 일곱 농가는 힘겨운 싸움을 견뎌내지 못하고 끝내 대체농지로 이전하면서 오랜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두물머리 네개 농가는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지루하면서도 피말리는 투쟁을 해야만 했다. 게다가 이해관계를 달리한 인근 주민들은 4대강 사업 지지 집회를 벌이며 공사를 촉구하는 상황이었으니 민주주의란 더불어 사는 세상에 대한 염원이기보다는 갈등을 조장하고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부추기는 마약과도 같은 제도인지도 모를 일이다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강요받으며 살았던 근대화 시대, 국가정책에 의해 선량한 개인들의 일상이 무너지는 과정을 그린 이문구의 소설 <암소> 빛바랜 사진 속 추억이 될 수 없는 것은 개벽이랄만큼 큰 변화에도 불구하고 국가와 개인을 둘러싼 결코 변하지 않은, 앞으로도 변할 것 같지 않은 본질 때문일 것이다. 

 

 

해학과 사투리로 감칠맛 나는 전개

 

"공슥이두 아직 쟘이 짚이 들던 않었을 텐디 그새 워치기 불을 끈다" 음성을 낮춰 핀잔하는 아내의 질척해진 밥풀눈이 곁눈으로 보이자 황씨는 버럭.

"불은 왜 꺼? 이나 잡어놓라니께, 얼어 죽게 뜰팡에다 내놓던지, 서캐가 실었나 군시러워 죽겄어." 지청구를 해대고 눈을 감았다. -<암소> 중에서-

 

소설 <암소>가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면 시청자들의 입가에는 잔웃음이 끊이지 않을 것 같다. 어떤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웃음코드를 내려놓지 않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소설의 주제를 이끌어가는 암소가 막걸리를 마시고 주정하다 탈진해 죽는 마지막 장면에서 소 배를 가르고 태중의 새끼를 꺼내 푹신 고아 남편 몸보신이나 시키리란 고랏댁의 생각이나, 죽은 고기는 반값이니 몇 근 사두고 그믐 대목까지 곰국을 내먹겠다고 생각하는 마을 사람들의 차마 내지를 수 없는 생각들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묘한 여운을 남겨준다. 비극을 결코 비극처럼 끝내지 않는 힘, 작가 이문구만의 독특한 매력이 아닐까.

 

그렇다고 저자가 현실을 외면하거나 지나치게 긍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저자에 대한 명예훼손이 될지도 모르겠다. 저자의 시선에는 궁핍한 일상을 살아가는 개인들에 대한 따뜻함이 묻어있기 때문이다. 특히 저자는 근대화 시절 궁핍한 농촌의 일상을 누구보다 생생하게 묘사해내고 있다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과 근대화로 포장된 일방적인 국가정책 속에서 개인들이 겪는 갈등이나 소외를 단순한 서술이 아닌 일상의 구석구석들을 구체적으로 포착하고 있다. 이런 궁핍한 개인들의 일상을 해학으로 풀어내는 저자의 의도는 이들에게 보내는 작은 희망의 메세지일 것이다. 타인의 비루한 삶을 보고 울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들에게 해픈 웃음조차도 보낼 수 없는 법이니까.

 

"저녀리 자슥은 …… 구구매(고구마)두 처먹어 쌓더라, 자그매 구워. 화루 식는개비다. 화루 쥑이먼 콩너물시루 은단 말여."

"쟘이 안 오니께 입만 굴품허잖유."

"업세, 니까징 것이사 뭣 때미 잼이 안 오네? 주먹만 헌 개 싹바가지 웂는 쇠리만 더럭더럭 헌단 말여."

"아버지넌 그럼 워째서 쟘이 안 오유." -<암소> 중에서-

 

웃음 코드와 함께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는 그야말로 압권이다. 고단했던 그들의 삶을 그들의 언어로 생생하게 묘사함으로써 그들의 삶이 고스란히 독자들에게 전달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대표작인 <관촌수필>을 비롯해 이문구의 소설들 대부분에서 보이는 만연체와 정감어린 충청도 사투리는 그가 비루한 삶을 영유하고 있는 개인들에 대해 얼마나 깊이있는 애정과 이해를 가지고 있는지 보여주는 가장 특징적인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국가정책에 무너지는 선량한 개인들의 일상

 

소설 <암소>가 가지는 해학적 요소는 대립구도에서도 여지없이 나타난다. 조상에게 물려받은 땅을 더 넓히지는 못했어도 법 없이도 세상을 살아왔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주인 황구만씨와 그런 주인을 오죽이나 못났으면 법 없이도 살까 비아냥 거리는 머슴 박선출. 머슴 주제에 주인을 대놓고 얕잡아보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어느 날 머슴 박선출이 주인 황구만씨를 상대로 고리대금업자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이 황당한 사연의 내막을 들여다보면 대충 이렇다. 황구만씨의 머슴으로 일하고 있던 박선출은 4년간 모은 재산을 황구만씨에게 맡겨놓고 군대에 간다. 황구만씨는 그 돈으로 작은 사업을 해보지만 세상 물정에 어두운 탓에 결국 망하고 만다. 이 과정에서 새 정부의 고리채 정리 정책에 기대어 보기도 했지만 황구만씨로서는 차마 못할 짓이기도 했다. 결국 황구만씨는 나머지 돈으로 소를 사서 키워 박선출의 돈을 갚기로 약속한다.

 

사실 소설에서 황구만씨와 박선출의 대립구도는 무의미한 설정일지도 모르겠다. 저자의 시선은 어떤 안전장치도 없이 국가정책으로 무너져가는 선량한 개인들의 일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화와 산업화라는 명목 하에 진행된 국가정책이 겉모양이야 그럴 듯하게 변화시켰는지 모르나 그 와중에 더 피폐해져 가는 개인들의 일상은 특히 국가정책에서 소외된 궁핍한 농촌 사회는 오히려 공동체의 해체라는 극단적인 결과를 양산하고 말았다. 시대의 변화를 감지할 능력이 없었던 황구만씨는 박선출이 맡긴 돈 팔만 원으로 소창직 직조틀을 서너 대 장만해 동네 계집애들 몇몇을 데리고 소창직 짜는 일에 희망을 걸었지만 농촌사회를 강타한 근대화의 바람 앞에서는 등잔불마냥 그저 힘없이 쓰러질 수 밖에 없었다. 소설에서 카시미론은 근대화와 변화의 상징이다. 기계화, 대량생산으로 대표되는 근대화의 물결 앞에 수공업에 근거한 소창직 직조틀은 그야말로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이다. 게다가 새로 생긴 제과공장과 전기기구 조립공장은 농촌사회의 전통적 공동체 가치를 파괴하면서 농촌사회의 해체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반해 암소의 상징적 의미는 근대화라는 국가정책에 파괴되어가는 농촌사회의 전통적 공동체의식 회복을 갈망하는 저자의 의도적 설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근대적 법과 제도의 건조하고 경직된 조정 대신 공동체라는 전통적 가치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국가정책으로 소외되어가는 개인들에게 보내는 저자의 따뜻한 시선을 상징하는 소재가 암소일 것이다. 황구만씨와 박선출의 대립이 근대적 사고에 기반한 각박한 개인주의적인 욕망이 아닌 순박하고 선량한 다만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인간 본래의 순수한 마음에서 기인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암소의 죽음은 황구만씨도 박선출도 국가정책에서 소외된 평범한 개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계속 모닥불은 터지게 얼어붙은 하늘을 태웠고, 타는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슬픔처럼 곡성이 멀리로 퍼지며 산과 들도 울먹이기 시작하게 했다. 겨우 제정신이 온 선출이가 사 년간 모아온 아픔으로 몸부림인 곁에서 신실이마저 신세타령 삼아 목놓아 울어대고부터는. -<암소> 중에서-

 

흔히들 민주주의과 다수결의 원칙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다수결은 항상 최후의 선택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다수의 횡포가 일상화되기 쉽고 더 나아가 일방적 국가정책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근거가 될 수도 있다. 일방적 국가정책은 때로 용산참사처럼 국가폭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민주주의의 진정한 미덕은 조정과 타협이다. 성공한 국가정책의 척도가 다수의 행복이 아닌 소외받는 소수를 최소화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민주주의의 원칙도 제대로 모르는 우둔한 자의 하소연에 불과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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