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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삼각의 집, 꿩과 함께 날아가버린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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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근찬(1931~2007) <삼각의 집>/1966

 

1966년 가을바람이 스산하게 불어대는 어느 날 오후, 미아리 산비탈은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집은 부숴져 내리고 허옇게 사람들이 들끓으며 여기저기 아우성으로 가득 찼다. 무너져 내린 집은 벌써 납작해져 버려 예전의 형체는 보이지도 않았다. 이 참혹한 광경에 누구든 횡경막이 수축되어 공기는 성대를 뚫지 못할 것이다. 멀리서 처량하게 트럼펫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빠—ㅇ 빠빵 빠—ㅇ 빠빵 빠응빠응 빵빠빠—ㅇ.

빠—ㅇ 빠빠응 빠응빠응빠응 빠—ㅇ 빠빵빵.

……

 

2009 120일 북극바람이 공기마저 얼어붙게 만든 새벽,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 남일당 건물 옥상에는 강제철거를 반대하며 생존권을 외치는 이들이 겨울바람을 막아서고 있었다. 이들을 생존권의 마지막 보루인 망루에 모여들었고 곧이어 경찰특공대가 투입되었고 갑자기 망루는 화염에 휩싸였다. 강제진압 25시간 만에 망루를 지켰던 이들은 겨울보다 더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왔고 살아남은 이들은 살아남은 것도 죄가 되는지 영어(囹圄) 의 몸이 되어야만 했다.

 

 

국민소득 몇 만불입네, 세계 몇 대 강국입네, 내일이라도 당장 선진국 반열에 올라설 것처럼 차려놓은 소문난 잔칫상 앞에 40년 터울을 두고 같은 서울 하늘 아래서 반복되고 있는 이 끔찍한 비극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고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하근찬의 소설 <삼각의 집>에서 세월을 거슬러 도시 철거민의 역사를 본다. 우리는 불행하게도 도시 빈민과 도시 철거민의 비극은 세월을 자양분으로 더욱 진화되고 있음을 용산참사에서 또렷하게 목도했다.

 

소설 <삼각의 집> 배경은 철거민 1세대라 할 수 있는 1960년대 도시 빈민이다. 전철연(전국철거민연합회) 자료를 인용하자면 기존의 농업중심사회에서 공업중심사회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던 1960년대 피폐한 농촌을 떠난 이들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도시지역 공단과 도심지 외곽으로 집중 이동하게 되고 이들은 노동자 계급으로 재편성되게 된다. 도시 집중화 현상은 과잉 노동력을 불러오고 급기야 실업 및 반실업자군이 양산되는 데 이런 과정을 거쳐 도시 빈민이라는 계층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근대화 시대 개발이라는 명목 하에 진행돼온 권력과 자본의 억압으로 다시 도시 철거민이라는 계층을 형성한다.

 

굴절되고 왜곡된 역사와 그 시대를 살아가는 민중들에의 서술은 저자 하근찬이 추구했던 일관된 흐름이다. 소설은 1960년대 도시 빈민의 주거형태를 뉴욕 무슨 신문사에서 발간한 국제 명작 사진첩속 삼각형 모양의 개집에 비유하면서 그들의 비루한 삶을 비극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삼각형인 것이었다. 물론 이 집도 정확하게 말하면 사진에 있는 그 개집처럼  오각형이었다. 지면에서 약 세 뼘 가량 흙으로 벽을 쌓아서 그 위에 삐쭉하게 지붕을 얹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얼른 보면 이것도 그 개집처럼 삼각형으로 보였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지붕이었다. …… 꼭 시골 가난한 아낙네의 치마를 연상케 했다. -<삼각의 집> 중에서-

 

약도로도 찾을 수 없을 만큼 무허가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미아리 산비탈의 풍경은 비단 1960년대 당시 도시 빈민들의 생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쨌든 사진 속 개집을 연상케 한 처남네 집의 겉모습과는 달리 내부는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추고 있다. 비록 외양은 누추하지만 이 집이 한 가족의 삶의 터전이요, 소중히 지켜져야 할 공간이라는 저자의 의지일지도 모르겠다. 

 

방 안으로 들어가니, 밖에서 생각하던 것보다는 괜찮았다. 꽤 넗은 방에 반들반들한 장판이 깔려 있었고, 벽에는 조그마한 창도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로 햇빛이 솔솔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 아무튼 꽤 키가 큰 나지만, 한가운데서는 허리를 굽히지 않아도 되었다. -<삼각의 집> 중에서-

 

 

게다가 처남댁은 병아리처럼 생긴 꿩 새끼를 기르고 있다. 이유인즉슨 집 근처 솔밭에 놓아길러 벌이를 하려는 것이다. 트럼펫으로 꿩을 새끼 때부터 길들여 언제 어디서고 트럼펫 소리 하나면 솔밭으로 모이게 할 수 있단다. 동물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는 처남의 말에서 국가와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됐던 당시 도시 빈민들의 애환이 짙게 배어있다. 꿩을 길들이는 처남을 통해 저자는 집이 단순한 주거공간이나 삶의 터전을 넘어 내일에의 꿈이 있고 희망이 있는 공간임을 상기시키고 있다.

 

한편 크리스마스 트리가 세워져 있고 은종이 금종이로 장식된 개집 사진은 사진첩 속 또 다른 사진의 비극성을 극대화시켜준다. 남루한 옷을 걸치고 한 손에는 불란서 문자가 선명한 깡통을 들고 한 손에는 하얀 꽃 한 송이를 들고 기대서 있는 알제리아의 소년이라는 제목의 사진이다. 또 하나는 두 눈이 움푹 꺼져 들어간 젊은이가 쩍 벌어진 어깨에 소총을 둘러메고 서 있는 식민지의 봄이라는 사진이다. 저자가 그토록 천착해온 역사의 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소설은 며칠 뒤 사진작가인 P군과 함께 찾아간 미아리에서 처남 집이 처참하게 무너져 내리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막을 내린다. 그 아수라장 속에 들리는 트럼펫 소리에 나의 와들와들 떨리던 속은 딸꾹질로 변하고 만다. 또 며칠 뒤 철거된 무허가 판잣집 자리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골고루 베풀어줄 교회가 들어선다는 소식에 나는 별안간 콧구멍이 간질간질하더니 급기야 재채기가 나오고 만다. 가난한 사람들을 내쫓고 그 자리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가 생긴다는 이 이율배반적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지구상에서 자본주의라는 말만큼 본연의 의미를 제대로 구현해낸 단어는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생존의 최소한인 집의 가치는 따스한 온기 대신 돈으로 환산되고 급기야는 투기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곳에서 들리는 생존을 위한 처절한 외침은 자본과 결탁한 권력에 의해 가녀린 메아리로 사라져만 간다. 소설 <삼각의 집>에서 서민을 외치는 권력의 비윤리성과 폭력성을 본다. 그 권력의 배후에는 괴물과도 같이 섬뜩하게 노려보고 있는 자본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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