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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불혹, 스노비즘, 구제역 그리고 살처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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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녕(1962~) <구제역들>/2011

 

오늘 아침 조간에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중 절반 이상이 자살 등 극단적 선택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학교폭력과 입시압박으로 자살한 청소년들의 뉴스가 신문을 장식한다. 4대강이 완공되면 가뭄이 사라진다던 공사 관계자의 말 뒤에는 쩍쩍 갈라지는 땅을 바라보고 있는 농부의 심장은 깊게 패인 주름의 깊이로 타들어 간다. 지구 반대편에서는 연애도 결혼도 포기해야만 하는 그리스 청년의 한숨이 들려온다.

 

오늘 아침을 여는 소리가 온통 신음뿐이고 한숨뿐이다. 그러나 어제 아침까지 나는 부끄럽게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어쩌면 들으려 하지도 보려 하지도 않았다는 말이 솔직한 고백일 것이다. 철이가 찾아가는 안드로메다 얘기도 아니고 별난 사람들의 얘기도 아닌데 나는 매일 신문을 빠르게 넘기고 있었다. 그래도 둘 셋이 모이면 나는 열을 내며 말을 한다. 얼핏 스쳤던 활자에 뼈를 만들고 살을 붙여 그럴듯한 논문 한 편을 뚝딱 만들어서 말이다. 윤대녕의 소설 <구제역들>은 이런 나를 진정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속물로 정의해 버린다. 심지어는 너무 끔찍해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지만 나는 구제역에 걸린 동물이 되고 만다. 제1종 바이러스성 가축전염병인 구제역은 치료제도 없단다. 그렇다면…….

 

 

불혹  

 

공자는 마흔 살을 불혹(不惑)이라고 했다. 정말로 사십 대는 미혹되지 않는 나이일까. 공자가 살던 시대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싫든 좋은 팔십은 살아야 하는 요즘에도 그럴까. 불혹을 지키기에는 남아있는 미혹의 세월이 너무 길지 싶다. 불혹은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의 중간지점에 위치해 있다. 사회적 책임과 개인적 욕망이 충돌하는 지점이기도 한 게 불혹의 시기다. 불혹을 넘긴 나(화자)와 두 살 터울로 불혹의 언저리 어딘가에 있을 동생 병수, 나보다 다섯 살 많은 누나까지 이들이 살아온 날은 이 시대 불혹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는 이들의 그것이다.

 

나처럼 여태 부모와 적대관계를 유지한 채 사는 불혹도 있고, 병수처럼 막내로서 받을 수 있고 또 요구할 수 있는 것을 뻔뻔히 누리면서 살아왔음에도 어느 누구에게든 부채감 따위는 눈곱만큼도 갖고 있지 않은 불혹도 있다. 누나처럼 단 한 번도 부모의 눈에 안겨본 적이 없으면서도 결국에는 가까이서 집사처럼 부모의 시중을 들고 있는 불혹도 있다.

 

한편 이 시대 불혹들에게는 부모세대와 자녀세대가 경험하지 못한 특별한 추억들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다. 20,30대 부정과 불의에 맞서 치열하게 싸워왔다. 대상이 다를지언정 어느 세대는 안 그랬을까. 그러나 불혹의 중년들에게는 특별하다고 하는 데는 자신들이 뿌린 씨앗이 자라 맺은 열매를 직접 수확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특별한 경험은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해 있다.  

 

스노비즘

 

정치적으로 지금의 불혹의 세월을 살아가는 이들은 진보와 보수의 경계 쯤에 서 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삶의 가치가 혼재되어 나타난 정신적 혼란이 지속되고 있는 세대가 지금의 불혹을 사는 중년들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나이가 들면 안정을 희구하게 된다는 게 인지상정이라고 하기에는 지금의 중년들이 살았던 20,30대가 너무도 치열한 투쟁의 연속이었고 그 투쟁에 담긴 진정성은 마치 종교와도 같았다.

 

문제는 젊은 시절 싸웠던 대상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더 진화된 무기를 탑재하고 게다가 한층 업그레이드된 능수능란함까지 갖추고 앞을 가로막고 있는데도 이제는 뒤돌아서거나 기껏해야 피해가는 쪽으로 선회하고 만다. 그럼에도 공개된 공간에서의 그들은 젊은 시절을 영웅담처럼 얘기하고 지금도 그 때의 진정성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나와 병수의 목적지는 부모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 몰라 누나가 알아본 예당 저수지 근처 추모공원이다. 그러나 나와 병수의 관심사는 추모공원이라기보다 태안에서 먹었던 낙지박속탕과 광시 한우마을의 등심 뿐이다. 이 형제에게 추모공원행은 자신을 버리고 살았던 누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뿐이다. 같은 날(입춘) 병수가 소백산에서 만나기로 했다는 여자친구도 만나야 된다는 말만 있을 뿐 스마트폰에, 트위터에 매몰된 병수에게서 꼭 만나야 한다는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그저 시간여행만 할 뿐 이들에게 진정성이라고는 찾을래야 찾아볼 수가 없다.

 

세속적인 집착과 속물적인 근성이 없으면 가정을 꾸리기 힘들더라 그런 말이외다.

 

병수의 이 말은 결코 만만할 수 없는 불혹의 삶을 관통한다. 영국의 작가 윌리엄 새커리의 <영국속물열전>(The Book Of Snobs)에서 변용되었다는 스노비즘(Snobbism, 속물근성)은 이 소설을 이루는 축이자 저자가 불혹의 등장인물들을 통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지금 대한민국을 사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구제역

 

불혹의 이 형제가 서로를 바라보는 단어인 속물을 숨기기 위해서는 또는 현재의 진정성없는 삶에 대한 변명이라도 하기 위해서는 과거와의 단절이 필요하다. 잃어버린 시간을 기억해내기 보다는 오히려 망각의 저 편으로 던져버리는 게 지금의 나를 정당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기도 하다. 추모공원 가는 길에 만났던 고향 사람에 대한 병수의 병적인 혐오는 스노비즘의 여러 증상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반갑긴 뭐가 반가워. 난 서울에서도 동향 사람을 만나면 본능적으로 피하게 되더라. 왠지 지겹고 끔찍한 느낌이 들거든. 형은 안 그래?

 

삶과의 끝없는 전쟁을 치르며 살아가야 하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속물이 되어가는 이 불혹의 형제에게 잃어버린 시간은 잊혀진 과거가 되어야만 한다. 단절을 시도하면 할수록 심연 깊은 곳에서 스물스물 기어올라오는 또 다른 역겨움. 결코 버릴 수 없지만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형태들을 버텨내기 위해 애써 잊으려 할수록 구제역에 걸린 동물처럼 내 살이 썩어 들어가고 있음을 직감하게 된다.

 

살처분

 

우리는 언제부터 자신과 닮은 족속을 만나게 되면 덥석 반가워하는 게 아니라 서로 끔찍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 걸까? 그리고 어느덧 발굽이 갈라지고 무릎이 썩어들어가기 시작하고 여기저기서 핏물이 배어나오고 전체가 하나로 병들어가는 지경에 이른 것일까?

 

2010 11월에 처음 발견되어 2011년 초까지 그 해 겨울을 강타했던 구제역. 저자가 구제역을 소재로 등장시킨 데는 권위주의의 해체와 동시에 찾아온 전혀 새로운 형태의 권위주의 앞에 방황하는 요즘의 한국사회에 보내는 작은 경고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힘으로 권위주의가 사라졌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기에 눈 앞에서 펼쳐지는 수구지향적 행태들은 우리로 하여금 가슴과 머리가 따로 작동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유도 분명치 않은 불안과 공포가 전신을 엄습해 오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순수는 무슨. 아직 철이 덜 든 거겠지. 아니면 근원적인 허무감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거나, 오죽하면 공황장애 판정을 받았겠수. 나도 존재감 때문에 꽤나 괴로워하며 산다 그런 뜻이유.

 

저자가 설정한 불혹의 나이는 어쩌면 서구 민주주의와 비교해 현재 우리사회가 살아가고 있는 민주주의의 나이가 아닐까. 입춘(立春)에 꽃이 피는 일은 드물다. 오히려 눈이 내리는 입춘이 더 흔하다. 성숙보다는 과정이 우리사회의 현재 모습이다. 그 속에서 과거의 진정성있는 가치들을 지켜내지 못한 채 돌연변이로 자라버린 속물근성은 소설 <구제역들> 주인공인 가 욕탕에 들어서면서 느꼈던 대로 살처분되어야만 하는 우리의 자화상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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