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에서 헤르메스(Hermes)는 올림포스 신들 중 가장 나이가 어리면서도 가장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는 신이기도 하다. 헤르메스는 제우스와 마이아의 아들로 목축, 웅변, 발명, 상업, 도둑, 거짓말 등을 주관하는 신이다. 특히 헤르메스는 제우스의 심부름꾼이자 전령사로 올림포스 신들 중 유일하게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신이다. 그리스 신화의 명가수 오르페우스가 아내 에우리디케를 찾으러 저승에 내려갈 때도 헤르메스가 동행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런 특징 때문인지 그리스 우체국의 상징이 다름아닌 헤르메스다.
헤르메스가 그리스 신화에서 가지는 다양한 특징들은 오늘날 많은 영어 단어들의 어원이 되기도 한다. 해석학(Hermeneutics)이라는 말도 헤르메스에서 유래했다. 게다가 헤르메스는 아버지 제우스를 닮았는지 바람둥이자 난봉꾼으로 많은 자식을 두었는데 여기서도 영어 단어의 어원을 찾을 수 있다.
Pan:전~, 모든 것을 아우르는, 범(凡)
수영선수 박태환의 활약으로 '판태평양 수영대회'라는 말을 종종 들을 수 있다. 여기서 판태평양이란 태평양 끼고 있는 모든 국가들을 아우르는 말이다. 판(Pan)은 헤르메스가 낳았다는 아들 이름이기도 한데 판이 된 사연이 기가 막히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에 따르면 목축의 신이기도 했던 헤르메스는 양치기 시절 드뤼오프스의 딸 페넬로페와 사랑을 해서 아들을 낳았는데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외모를 가졌다고 한다. 얼굴은 사람인데 목 아래로는 털투성이에 허리 아래로는 영락없는 염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들의 이런 외모 때문에 페넬로페가 아닌 암염소가 헤르메스의 아내였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헤르메스는 아무리 흉칙한 외모라 하더라도 신인지라 아들을 데리고 올림포스로 올라갔다. 올림포스 신들은 헤르메스의 아들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이름은 지어야겠기에 사람의 얼굴이며, 뿔이며 꼬리, 털 등 온갖 것을 가지고 있어 '판(Pan)'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다. 헤르메스는 키오네와의 사이에서도 아우톨리코스라는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은 훗날 아버지 헤르메스를 닮아 유명한 도둑이 되었다고 한다. 트리이 전쟁의 영웅 오디세우스도 이 아우톨리코스의 자손이다. 오디세우스가 목마를 만들어 트로이에 침입한 것도 조상들의 피를 이어받았기 때문이지 싶다. 또 헤르메스는 헤파이스토스의 아내이자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 사이에서도 헤르마프로디토스라는 자식을 낳았는데 헤르마프로디토스는 남성과 여성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 오늘날 암수 한몸을 의미하는 '허마프로다이트(Hermaphrodite)'의 어원이 된다.
Panic:공포,공황
헤르메스의 아들 판도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닮아 꽤나 여자를 밝혔나 보다. 판은 요정이나 인간 세상의 여자들을 보면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덮치곤 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얼굴만 인간일 뿐 그외 다른 신체는 모두 염소를 닮았으니 요정과 인간들이 판을 보면 느꼈을 공포는 장난이 아니었을 것이다. 여기서 유래된 단어가 'Panic'이다.
Panflute:팬플루트, 피리와 비슷한 악기의 이름
또 헤르메스의 아들 판은 쉬링크스라는 요정을 사랑한 있었다. 쉬링크스는 아름다운 외모에도 불구하고 오직 아르테미스 신만을 숭배할 뿐 남자들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이런 쉬링크스에게 흉칙하게 생긴 판의 구애가 먹힐 리 없었다.
판의 끈질긴 구애에 쉬링크스는 물의 요정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판이 쉬링크스를 껴안는 순간 쉬링크스를 갈대로 변신시킨 것이다. 판은 갈대를 껴안고는 신세 한탄을 했다. 그런데 판의 탄식이 갈대 줄기를 타고 슬픈 소리로 되돌아왔다. 판은 이루지 못한 사랑을 달래기 위해 쉬링크스가 변신한 갈대를 꺾어 피리로 만들어 쉬링크스가 생각날 때마다 불고 다녔다. 'Panflute'는 '판이 부는 피리'라는 뜻이다.
공작새의 화려한 꼬리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헤르메스는 아버지의 불륜을 도와주기까지 했다. 하기야 헤르메스가 제우스의 심부름꾼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긴 했다.
제우스가 강의 신 이나코스의 딸 이오와 애정행각을 벌이다 아내인 헤라 여신에게 들킨 적이 있다. 제우스는 재빠르게 이오를 암소로 변신시켰다. 그러나 헤라가 누군가! 제우스보다는 못하지만 여신 중에 여신이 아닌가! 암소가 이오라는 사실을 눈치챈 헤라는 제우스에게서 암소를 받아 아르고스(눈이 백개 달린 거인)에게 감시를 맡겼다.
제우스는 암소가 이오라는 사실이 탄로날까봐서 헤르메스를 시켜 이오를 구출해 오게 했다. 눈이 백개나 되는 아르고스의 감시를 뚫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르고스도 헤르메스의 피리소리와 화려한 입담에는 어쩔 수 없었다. 헤르메스의 피리소리와 이야기에 백 개의 눈이 모두 잠기기 시작했다. 헤르메스는 때를 놓치지 않고 아르고스의 목을 치고는 이오를 구출했다. 한참 후에야 아르고스의 죽음을 알게 된 헤라는 아르고스를 불쌍히 여겨 눈을 뽑아 자신이 가장 어여삐 여기는 공작새의 꼬리에 달아주었다. 공작새의 꼬리가 화려한 것도 다 이 때문이다.
신들의 세계에서도 정상적이지 못한 사랑에는 혹독한 댓가가 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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