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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세계 각국이 동성애에 대해 관대해졌다는 보도를 접한 적이 있다. 미국 시카고 대학교 국가여론연구센터(National Opinion Research Center)에 따르면 1988년부터 2008년까지 전 세계 30여개 국가에서 동성애에 관한 견해를 묻는 5가지 설문조사를 했는데 구사회주의권 국가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국가에서 동성애에 대한 인식이 예전에 비해 너그러워졌다고 한다. 현대사회에서 동성애에 관한 인식의 차이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 같다. 이념적으로는 진보와 보수를 구분하는 잣대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차별의 대표적 상징으로서 사회적 편견의 정도를 가늠해 주는 바로미터가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사회주의권 국가들과 사랑으로 대표되는 종교를 국가적 이념으로 채택하고 있는 국가들에서 동성애에 대한 편견이 심하다는 사실은 동성애가 단순히 이념과 편견의 문제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에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 동성애가 심심찮게 다뤄지기고 있어 겉으로는 민주주의의 다양성에 관한 상당한 진보가 이루어진 듯 하지만 희화화하고 흥미를 주는 소재로서의 역할에 그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동성애에 관한 편견은 단순히 동성애 자체에 그치지 않는다. 또다른 편견을 생산해내기 위한 도구로 사용될 때 동성애는 여성을 폄하하는 완벽한 수단이 되기도 했다.

그리스 신화를 읽다보면 종종 등장하는 사포(sappho)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것이다. 신화에 많이 등장하지만 사포는 신이 아니라 실존했던 그리스 시인이다. 고대 그리스를 대표하는 철학자인 플라톤보다 200여 년 전 인물로 추정된다. 그런데 사포가 어원이 된 영어 단어들은 불행하게도 동성애와 관련된 말들이 많다. 새피즘(sapphism, 여성동성애), 레즈비언(lesbian, 여성동성애자)이 바로 그것이다. 단어에서 짐작하다시피 새피즘은 사포의 이름에서, 레즈비언은 사포의 고향 레스보스 섬에서 유래된 말이다. 

사포는 어떻게 여성동성애의 상징이 되었을까?

사포는 기원전 7세기에 활약했던 그리스를 대표하는 시인 중에 한 명이다. 그보다 후대 인물인 플라톤은 사포를 10번째 무사이로 극찬했다. 무사이가 누군가! 그리스 신화에서 문화와 예술을 관장하는 아홉 뮤즈들을 일컬어 무사이라고 부르는데 플라톤은 사포의 예술적 재능을 신의 반열에까지 올려놓았던 것이다.

사포의 고향 레스보스 섬이 레즈비언의 유래가 된 것은 당시 레스보스 섬 여성들의 활발한 사회활동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레스보스 여성들은 각종 사교모임을 통해 오락과 예술을 즐겼다고 한다. 그 중심에는 단연 사포가 있었다. 그는 많은 숭배자들을 몰고 다녔는데 다양한 사교모임을 하고 있었던 레스보스 여성들은 시와 음악을 배우기 위해 사포 주위에 몰려들었다고 한다. 레즈비언(lesbian)을 직역하면 '레스보스의 여자들'이란 뜻이다. 이 말이 어떻게 여성동성애자를 상징하는 뜻이 되었을까?

위대한 신화 이야기꾼이었던 故이윤기 선생은 그의 저서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통해 사포가 레즈비언으로 둔갑한 데는 남성우월주의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리스 역사 어디에도 사포가 동성애자였다는 기록이 없다. 이윤기 선생은 사포가 당시 레스보스 여성들을 육체적으로 사랑한 게 아니라 남성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지위가 열악했던 여성들을 계몽하려 했고 여성들의 사교모임을 통해 인간 본성의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내면을 솔직하게 드러냄으로써 여성을 가정의 속박에서 해방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레즈비언'은 이런 사포를 폄하하기 위해 남성들이 만들어낸 말이라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이윤기 선생은 사포를 최초의 여성해방론자로 평가하기도 한다. 

 

실제로 고대 그리스 관련 책들을 읽다보면 동성애를 연상시키는 문장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특히 플라톤의 저서 <향연>에는 소크라테스가 당대 최고의 꽃미남 장군이었던 알키비우스를 열렬히 사랑했던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고 지금 소크라테스를 동성애자였다고 단정하는 사람은 없다. <영웅전>으로 유명한 플루타르코스도 당시 레스보스 섬의 덕망있는 부인들이 소녀에게 사랑고백 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고 쓰고 있다. 이는 고대 그리스의 교육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어린 청소년들을 건전한 민주시민으로 키우기 위해 잦은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졌던 과정과 관심이 이렇게 표현되지 않았나 싶다. 참고로 사포를 신의 반열에까지 올려놓고 민주주의의 개념을 다진 플라톤은 철저한 차별주의자였다고 한다. 여성과 노예. 

다시 사포로 돌아가보면, 위에 있는 그림 <다비드의 사포와 파온>이라는 그림에서 보듯 사포는 그리스 청년 파온을 열렬히 사랑했다고 한다. 그러나 끝내 파온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레우카디아의 절벽에서 자살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림에서 사랑의 신 에로스가 등장한 것은 사랑이라는 주제의식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사포와 파온이 처음 만났던 장소가 에로스의 어머니 아프로디테 신전이었기 때문이다.

이윤기 선생은 사포의 자살마저도 남성우월주의의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남성들은 여성의 최후의 순간에도 반드시 남성을 세워놓고 싶은 욕망이 있다는 것이다. 어찌됐건 차별로 대표되는 동성애, 특히 여성동성애의 어원도 또다른 형태의 차별(남성의 여성에 대한 차별)에서 시작되었다는 신화 이야기는 사뭇 의미심장하다. 이는 차별과 편견이라는 단어의 속성 자체가 비인간적이라는 신화의 메타포가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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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여강여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