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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왜 일본은 이광수에게 조선예술상을 주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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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의 <무명>/1917년

김동인의 소설 『태형』이 감옥이라는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의 비인간성을 묘사하고 있다면 이광수의 소설 『무명』은 동일한 감옥이지만 일반 감옥이 아닌 병감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펼쳐지는 인간의 탐욕과 폭력을 그려내고 있다. 문학적으로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여기서 무명은 빛이 없는 세상(
無明)으로 닫힌 극한의 세계를 의미한다.

내용은 이렇다. 병감에는 작중화자 '나'를 비롯해 공문서 위조단의 공범 윤씨와 방화범 민씨, 설사병 환자 정씨, 신문지국 기자로서 부자와 과부 며느리의 불륜을 폭로하겠다는 댓가로 금품을 뜯어낸 강씨 그리고 또다른 방화범 간병부가 함께 생활하고 있다. 이들은 서로를 비방하며 알수없는 자존감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를 헐뜯던 열정과 달리 이들의 병세는 점점 악화되어 간다. 결국 작중화자 '나'가 출소한 이후 윤씨의 죽음 소식을 전해 들으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특히 이 소설에서는 작중화자 '나'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등장인물간 대립과 갈등이 아무리 격화돼도 '나'에게만은 다들 공손한 태도를 취한다. 당시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이광수의 시혜의식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또한 소설 『무명』은 1939년 일본어판으로 번역되어 제1회 조선예술상을 받게 된다. 

왜 제국주의 일본은 이광수에게 제1회 조선예술상을 주었을까? 또 나는 왜 소설 『무명』을 통해 이런 발칙한 상상을 하게 되었을까? 소설 『무명』이 발표된 1939년을 전후한 이광수의 행적을 더듬어보면 불편한 진실과 만나게 된다. 

소설 『무명』은 상황소설이자 체험소설이기도 하다. 이광수는 1937년 도산 안창호가 우리 민족의 실력을 양성해서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취지로 설립한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한 적이 있다. 저자는 이 수감 체험을 바탕으로 소설 『무명』을 집필하게 된다. 문제는 이 사건으로 이광수가 변절의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이다.

더불어 이광수는 1939년 설립된 조선문인협회의 창단멤버가 된다. 주지하다시피 조선문인협회는 일본이 문학을 침략의 도구로 삼기위한 어용단체로 반도문단의 새로운 건설을 위한 내선일체를 창립선언문에 당당히 내세우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가 소설 『무명』을 단순한 문학적 가치로만 평가했을까 의문이 생기는 이유이다.

이름없는(無名) 가련한 죄수들의 이전투구는 조선놈은 맞아야 한다는 일제의 논리와 일맥상통해 보이고 소설에 나타난 시혜의식은 이광수가 1922년 잡지 <개벽>에 기고한 민족 개조론의 연장선에서 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기적이고 나약한 겁쟁이인 조선민중은 엘리트 집단에 복종해야 한다는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많다. 그러나 민족개조론 주장의 취지가 아무리 순수했다손 치더라도 그의 변절은 그 순수성을 의심받기에 충분하다.

해방 이후 열린 친일 부역자 처벌을 위한 반민특위에서도 해방이 1년만 늦었어도 조선 사람들은 황국신민의 대우를 받았을 것이라고 주장한 그가 아니였던가!

소설 『무명』은 당시 발표된 소설들과 비교해서 작은 병감 안에서 이전투구하는 잡범들의 심리묘사를 탁월하게 그려낸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변절의 계기가 된 체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라는 점에서 뛰어난 문학적 가치는 물론 순수하지 못한 정치적 의도를 동시에 생각하게 한다.

그는 병감이라는 극한의 상황(無明)에서 무명(無名)의 잡범들간 펼쳐지는 탐욕스러운 이전투구를 통해 열등한(?) 조선민중들을 보여주려 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는 『무명』을 통해 그의 이런 의도를 간파하고 제1회 조선예술상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당돌한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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