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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소설 '감자'를 통해 무상급식의 당위성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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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인의 <감자>/1925년

어제(12월8일) 국회는 내년도 예산안 처리를 놓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친수구역 활용에 관한 특별법'과 '국군부대의 아랍에미리트 파병 동의안' 등 그동안 여야 대립이 심했던 법안들도 예산안 처리와 동시에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을 통해 한나라당 단독으로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명박 정부 들어 벌써 3번째 예산안 '날치기'다.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외쳐대는 '소통'은 어디론지 사라지고  '먹통'만 남은 꼴이 되었다.

한편 언론의 관심이 온통 '난장판 국회'로 쏠려있는 동안 내년도 예산안에 방학 중 결식아동 지원예산이 전액 삭감된 것으로 나타나 충격을 주고 있다. 얼마 전에는 서울시 의회가 무상급식 조례안을 통과시키자 오세훈 서울시장이 이에 항의하며 잠적해 버리는 일도 있었다. 두 사건을 보면서 현정부가 부르짖는 친서민과 공정한 사회에 대한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 없다.

당장 내년부터 저소득층 아이들은 방학이 되면 밥을 굶게 될 위기에 처했으니 말뿐인 복지에 허탈감은 물론이거니와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했다. 먹을 수 있다는 것 즉 굶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자 권리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부딪쳐야 될 대부분의 문제와 사회적 모순은 먹는 것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먹을 수 있냐 없냐의 문제에서 시작된다.

 
▲영화 [감자]의 한 장면, 1987년작 출처:다음

김동인의 단편소설 『감자』는 살기 위해, 먹고 살기 위해 타락해 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문학 평론가들은 『감자』를 '환경결정론'에 입각한 소설이라고 한다. 이게 무슨 말일까? 인간은 자신이 처한 환경에 지배받는다는 말이다. 선비에서 농민으로 다시 빈민의 신분으로 추락한 복녀에게 선비 집안에서 지녔던 엄한 규율은 사치에 불과했다. 먹기 위해 거랑질도 해야 했고 살기 위해 몸이라도 팔아야 했다. 남편인 영감은 복녀의 타락을 묵인해야만 했고 때로는 부추겨야만 했다. 그들은 그렇게 먹고 사는 문제와 투쟁해야 했다.

비록 『감자』의 배경이 일제시대라고는 하나 사람사는 세상의 요지경은 늘 그대로다. 크로노스가 세월과 기억을 잡아먹는 시간을 상징하는 신인 것처럼. 변화가 있었다면 국가라는 개념이 확실히 제자리를 잡았고 국가의 역할이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1920년대 복녀는 국가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권리가 그리 많지 않았다면 2010년 복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다운 삶은 복녀의 권리이고 복녀에게 사람다운 삶을 영위케 해주는 것은 국가의 의무이다.

물론 소설 『감자』에도 국가의 역할이 아예 없지는 않다. 평양부에서 기자묘 솔밭에 들끓는 송충이를 잡기 위해 칠성문 밖 빈민굴의 여인들을 인부로 쓰게 되었다. 오늘날 공공근로와 비슷한 개념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국가의 국민에 대한 의무라기보다는 시혜의 개념에 불과했다. 어찌됐건 거랑질로 전전하던 복녀에게도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복녀의 도덕적 추락을 부채질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열심히 일해봐야 목구멍에 거미줄이나 거둬주는 수준에 돈밖에 손에 쥘 수 없었던 복녀는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다. 몸을 파는 것이 그것이었다. 순전히 먹고 살기 위해서 복녀는 스스로 타락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국가가 국민들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복지의 시작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속담을 요즘은 좀 더 세련된 표현으로 '밥이 인권'이란 말로 자주 사용하곤 한다. 국가가 국민의 인권을 존중하고 지켜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면 그것의 시작은 굶지 않을 권리를 누리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무상급식의 실시는 현정부의 복지와 인권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잣대가 될 수 있다. 먹는 문제가 해결되었다면 복녀의 타락은 아니 소설 『감자』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현정부는 무상급식을 '포퓰리즘'으로 매도하고 있다. 왜 부자 자녀들에게 공짜로 밥을 먹여주어야 하나며 타박이다. 왜 다이어트하는 아이들에게 점심을 제공해야 하냐며 조롱한다. 이들은 보편적 복지에 지나치리만큼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 이면에는 자본주의의 단물을 독식하려는 음모가 숨어 있다고 밖에 볼 수 있다. 이들은 그들이 주장하는 선택적 복지로 마음에 상처를 받게 될 아이들은 안중에도 없는 듯 하다.

다시 소설 『감자』로 돌아가보자. 복녀의 타락은 감자를 훔치러 갔다 만난 중국인 왕서방을 만나면서 비극으로 치닫게 된다. 왕서방은 감자밥 주인이었다. 왕서방과의 동침을 통해 그 어느 때보다 큰 돈을 만지게 된 복녀는 어느날 왕서방이 젊은 여자를 들인다는 소식에 격분해 왕서방을 죽이려다 도리어  왕서방에게 빼앗긴 낫에 비극적 최후를 맞고 만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는 돈의 노예로 전락한 인간 군상들의 부도덕성이 읽는 이들을 분노케 한다. 왕서방과 복녀의 남편 그리고 한방 의사 세사람은 부적절한 돈거래를 통해 복녀의 죽음을 뇌일혈로 조작하는 파렴치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상상을 해본다. 만일 복녀가 죽지 않고 지금처럼 어찌어찌 살면서 영감과 사이에 아이를 낳았다면 그 아이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 어렵지 않은 시나리오가 그려질 것이다. 가난은 대물림 되었을 것이고 그 아이 또한 굶지 않기 위해서 부모와 같은 삶을 반복해야만 할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말하는 공정한 사회는 출발이 공평해야 비로소 실현 가능한 구호가 될 수 있다. 출발이 공평하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해 주어야 가능해 진다. 바로 굶지 않을 권리가 그것이다. 무상급식은 이 굶지 않을 권리의 작은 시작인 셈이다. 칠성문 밖 빈민들의 자녀들에게도 공평한 기회를 주고 한 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 서게 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다.

더 이상 복녀의 시체를 둘러싸고 돈거래에 열중하는 왕서방과 영감과 의사가 되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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