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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시인의 마을

무서운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그 남자의 정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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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은 시인의 '겨울방학'

 

목포에서 뱃길로 2시간. 어릴 적 기억으로는 2시간이 훨씬 넘었던 것 같다. 육지로 나오는 일이 연중행사보다 더 더물었을만큼 낙도 중의 낙도가 내 고향이다. 중국 쪽에서 들리는 닭우는 소리에 잠을 깨고, 중국 쪽 하늘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저녁 때가 되었음을 안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있을 정도로 오지 중의 오지였다. 하기야 바닷가에 산 친구들에 따르면 태풍이 불 때면 중국 어선들이 정박했다고 하니 실제로 중국이 그리 멀지 않은 섬임에 틀림없었다. 육지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섬이었는데도 대부분이 농사를 생업으로 삼고 살았기 때문에 태풍 때문에 중국 사람들을 봤다는 친구들의 이야기는 호기심으로 귀를 쫑긋하기에 충분했다.

 

변변한 장난감 하나 구하기 힘들었던 터라 이맘 때쯤이면 산으로 들로, 바닷가로 나가 봄꽃을 꺾고 노는 게 다였다. 이름을 아는 꽃이란 진달래나 동백꽃이 고작이었지만. 특히 바닷가에 피어나는 이름모를 꽃들은 대부분 절벽에 기대고 서 있어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신비한 경험이었다. 어쨌든 피곤한 줄도 모른 채 저 멀리 섬 뒤로 해가 떨어지고서야 꺾어온 봄꽃을 마당에 심기도 하고 사카린(설탕)을 넣은 병에 담아두면 그만한 음료수도 없었다.

 

그날도 동네 개구장이 또래들이 다 모였다. 두세 살 차이는 다 친구 먹었으니 아무리 작은 섬마을이래도 일단 모이기만 하면 온동네를 시끌벅적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소대를 만들어 간 곳은 산을 두 개(지금 기억으로)는 넘어 바닷물이 빠지면 걸어서 건널 수 있는 작은 무인도였다. 봄이 되면 그 섬 전체가 흐드러진 동백꽃으로 장관이었다. 작은 동백나무를 캐 마당에 심을 양으로 봄이면 자주 찾던 섬이었다.

 

린 우리에게는 꽤 높아 보였던 첫번 째 산을 넘고 산 정상이 평평한 구릉이었던 두번 째 산을 넘을 때였다. 어떤 사내가 밀짚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무덤처럼 보이는 짚더미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그 사내의 옷은 땟국물로 가득했고 밀짚모자 틈으로 보이는 얼굴은 오랫동안 깎지 않았던지 새까만 수염이 지저분하게 덮고 있었다. 흡사 흑백 텔레비젼에서 봤던 늑대인간 같았다. 봄햇살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개구장이 소대의 시끌벅적한 수다 때문이었는지 그 사내는 꿈틀꿈틀 대더니 이내 손으로 모자를 치켜올리더니 우리를 보고 씩 웃었다. 드러난 얼굴은 진짜 늑대인간이었다. 아니 낮에도 돌아다닌다던 귀신이었다.

 

누구랄 것도 없이 우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넘어지고 부딪치고 다시 동네로 돌아오는 길이 그렇게 멀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마을로 돌아와서는 동네 어른들을 마주칠 때마다 가쁜 숨을 헐떡이며 귀신을 봤다고 했다. 동백섬 앞산에 귀신이 나타났다고. 어른들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우리는 답답했다. 귀신이 나타났다는데 왜 웃기만 하는걸까. 그 날 이후로 우리는 다시는 그 동백섬에 가지 않았다.

 

그렇게 밀짚모자를 눌러쓴 낮 귀신은 우리의 어린시절을 지배하고 있었다. 무서운 동화 속 이야기처럼. 그 사내가 기대고 있었던 짚더미의 정체를 알기 전까지는. 귀신을 믿지 않는 나이가 되어서도 그 남자는 여전히 귀신만큼의 악몽으로 남아있었다. 짚더미의 정체를 알게 된 건 어른이 되어서도 한참 지나서였다.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우리 섬동네만의 특별한 문화였다는 것을. 짚더미의 정체는 다름아닌 초분(草墳)이었다. 그 남자는 초분의 주인이었다.

 

초분(草墳). 초분은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땅에 묻지 않고 돌이나 통나무 위에 관을 얹고 탈육될 때까지 이엉과 용마름 등으로 덮은 초가 형태의 임시 무덤을 말한다. 이삼년 후에 다시 해체해 유골을 깨끗이 씻은 다음 땅에 본장하는 서남 해안 지역에 남아있던 특이한 장례문화가 초분이다. 초분을 하는 이유는 부모가 죽은 후 바로 매장하는 것을 불효로 여겼기 때문이다. 저 세상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믿음으로 초분을 해두었다가 깨끗한 백골만을 땅에 묻는 것이 자식된 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초분은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옆에서 잠을 자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비로소 어릴 적 보았던 그 짚더미의 정체며 오랫동안 귀신으로만 알았던 그 남자의 정체가 밝혀진 순간이었다. 그 날 이후 분명히 동네에서 그 남자를 마주친 적이 있었을텐데. 끝내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 아저씨는 우릴 볼 때마다 속으로 얼마나 웃었을까.

 

강성은 시인의 '겨울방학'을 읽자마자 어릴 적 무서운 동화 속 이야기 같았던 기억이 뇌리를 휙 하고 스쳐갔다. 그 무서운 이야기의 뒤에는 초분이라는 독특한 장례문화가 있었다는 것도. 시(詩) 속에서 길을 잃은 우리를 동네로 안내해 준 그 남자의 정체는 누구일까. 정말 귀신이었을까? 어릴 적 이야기 속에는 어른들의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순수함과 천진함이 있다. 

 

 

 

겨울방학

 

겨울산에 토끼 잡으러 갔다. 나와 동생과 사촌동생, 우리 셋은 한번도 잡아본 적 없는 토끼를 잡으로 나섰다. 흰눈이 무릎까지 오는 산이었다. 토끼는 보지도 못하고 길을 잃었다. 해가 지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숲에서 나와 여기서 뭐 하냐고 물었다. 집으로 가고 싶은데 길을 잃었다고 말했다. 남자가 가리켜준 방향으로 캄캄한 산을 내려와 도로를 따라 몇시간 걸었다. 불빛이 보일 때까지. 밤늦게 집에 도착한 우리는 어른들에게 엉덩이를 맞으며 울었다. 다음날 사촌동생은 방학이 끝나 서울로 갔다. 며칠 뒤에 동생이 산에서 귀신을 봤다고 말했다. 나는 그 남자가 귀신이라고 말했다. 얼마 후 동네에서 그를 봤다. 산에서 봤을 때보다 많이 늙어 있었다. 할아버지가 되어 지게를 지고 있었다.

 

-강성은: 1973년 경북 의성 출생. 2005년 문학동네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가 있음.- 출처: 『창작과 비평』2013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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