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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시인의 마을

집의 의미를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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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미의 시 '집의 형식'

 

코끼리의 발이 간다. 예보를 넘어가는 폭설처럼, 전쟁의 여신처럼, 코끼리의 발은 언제나 가고 있다.

코끼리의 발이 집을 지나가며 불평한다. 더 무자비해지고 싶어. 비켜줄래?

 

거미의 입이 주술을 왼다. 거미는 먼저 꿈을 꾸고 입을 움직인다.

너의 집에서 살고 싶어. 너의 왕처럼, 너의 벽지처럼.

 

푹퐁이 모래언덕을 따끈따끈하게 옮겨놓을 때, 나의 집이 나를 두고 무화과 낯선 동산으로 날아가려 할 때.

 

나는 모래의 집을 지킨다. 매일 거미줄을 걷어내고 코끼리가 부서뜨린 계단을 고친다. 가끔 차표를 사고 아침에 버리지만.

상냥한 노래는 부르지 않을래.

폭풍에게 정면을 내주지 않을래.

 

코끼리를 막을 힘이 나에겐 없지. 코끼리의 발이 코끼리의 것이 아닌 것처럼.

거미는 나를 쫓아낼 수 없지. 거미의 말을 거미가 모르는 것처럼.

 

거미는 줄을 치면서 거미의 얼굴을 지나간다. 나는 모래의 집을 지키면서 나의 얼굴을 지나간다.

코끼리의 발은 간다. 코끼리의 발을 막을 힘이 누구에게도 없다.

 

출처>『창작과 비평』2012년 가을호

이성미: 2001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시집 <너무 오래 머물렀을 때>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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