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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가 흘린 눈물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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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판 사나이/김영하/2003년

 

슐레밀은 회색옷을 입은 신사에게 자신의 그림자를 팔고 그 댓가로 자기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얻을 수 있는 행운 주머니를 받게 된다. 그림자는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지만 행운 주머니는 그에게 부와 명예를 가져다 줄 수 있으니 회색옷을 입은 신사의 제의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림자를 팔아버린 슐레밀은 행복했을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던 그림자를 팔아버린 후 슐레밀은 그림자가 없다는 이유로 외톨이가 되었고 애인마저도 슐레만을 떠나게 된다. 돈만으로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안 슐레만은 그림자를 팔았던 자신을 후회한다. 이 때 다시 나타난 회색옷을 입은 신사는 빼앗긴 그림자와 슐레만의 영혼을 맞바꾸자고 제안한다. 슐레밀은 비로소 회색옷을 입은 신사가 악마임을 깨닫고 그 유혹을 물리친다. 슐레밀은 자기에게 남아있던 돈을 전부 털어 장화 하나를 사서 신고 세계 여행을 떠난다. 행운 주머니를 가졌을 때도 행복을 느끼지 못했던 슐레밀은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비록 외롭지만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림자를 사고 팔 수 있다는 황당무계한 이 이야기는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Adelbert von Chamisso, 1781~1838, 프랑스)의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이다. <페터 슐레밀의 기이한 이야기>라고도 하는 이 소설은 현대인의 헛된 욕망을 희화화하고 있다. 소설에서 그림자는 자신의 정체성과 양심을 상징한다 하겠다. 한편 슐레밀이 그림자를 팔게 된 과정과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된 이후의 여정을 보면 소설은 물질문명의 급격한 발전으로 자꾸만 소외되는 현대인의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자를 거부한 사나이

 

김영하의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는 샤미소의 소설을 모티브로 한 동명의 소설이다. 샤미소의 소설이 자본주의 태동기에 불거지기 시작한 인간소외를 다뤘다면 김영하의 동명 소설은 자본주의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는 현대 사회의 고질병이 되어버린 인간소외 문제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김영하의 <그림자를 판 사나이>는 샤미소 소설의 제목만 차용했을 뿐 실제로는 '그림자를 거부한 사나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소설 마지막에 등장하는 '그리고 운다'라는 문장에서 어렵지 않게 유추해 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림자를 판 사나이 아니 그림자를 거부한 사나이가 울 수밖에 없었던, 흘려야만 했던 눈물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소설은 어린 시절 누구나 한번쯤 품어봤던 의문에서 시작한다. 저 별빛은 어디에서 오고 내가 들고 있는 플래시의 불을 밝혀 별을 겨누면 언젠가 그 별에 닿게 되겠지라는 것 말이다. 어린 시절 호기심일뿐 결코 닿을 수 없다. 저자가 현실에서는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어린 시절 호기심을 소설 첫머리에 언급한 것은 이 소설을 관통하고 있는 인간소외 문제의 해결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미리 밝혀두고 있는 복선인지도 모르겠다. 군중 속의 한 부분에 머물러 나만의 정체성이 애매모호해진 현대사회에서 소외는 타자에 의해 강요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으로 옮겨가는 경향이 크다. 그만큼 현대사회의 문제해결능력이 한계에 봉착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타인과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소통을 시도한다. 소설에서는 이런 현대인의 관계맺기 시도를 흔적 찾기로 묘사하고 있다. 독신주의자인 나와 신부인 바오로, 인체발화사고로 남편을 잃은 미경은 소외된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어릴 적부터 친구이자 연인이었던 그들은 과거 흔적을 되짚으면서 또 다른 관계, 단절된 관계의 복원을 시도한다. 주인공인 '나'가 그림자를 거부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엄마와 나의 일화를 통해서 유추해 볼 수 있다.

 

결혼을 마치 홈쇼핑처럼 여기는 여자를 어찌 당하랴. 엄마는 결혼이라는 제도의 소비자였다. 언제나 턱을 당당하게 쳐들고 자기 권리를 요구했다. "물러줘." "망쳐놨으니 책임져." 엄마는 그 몇 마디로 평생을 대체로 잘 살았다. 자식에 대해서도 별다르지 않았다. 나로선 편한 면도 있었다. 이를테면 엄마는 내 결혼을 결코 재촉하지 않았다. "너 좋을 대로 해. 결혼, 그거 남자한텐 손해야." -<그림자를 판 사나이> 중에서-

 

날아가는 새도 그림자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만 나에게는 그런 상황이 불안과 공포로 다가온다. 그럼에도 나는 흔적찾기를 통해 관계맺기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그가 울어버린 이유 

 

 

미경을 바래다 주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미경과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상 함께 지내보면 까짓,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같이 아침 먹고 바쁜 그녀를 출근시키고 녹차를 마시고 소설을 쓰고 음악을 듣고 퇴근하는 그녀와 저녁을 먹는 것이다.…중략그렇게 누군가와 옥닥복닥 부대끼며 지내다 보면, 어쩌면 내게도 그림자가 생길지 모른다. -<그림자를 판 사나이> 중에서-

 

그러나 결국 나는 그림자를 거부하고 만다. 침대 속으로 들어가 울어버린 나. 나는 소통하지 못하는 군중 속 외톨이인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과거 흔적을 되짚으며 되살린 관계맺기는 다분히 낭만적 상상의 범주일 뿐이다. 정작 관계맺기가 성사된다면 그 이후로는 낭만이 아닌 현실이 된다. 현실은 거대한 사회적 장벽과의 투쟁이다. 그러나 현대화가 진행될수록 사회적 장벽의 높이는 개인이 감히 넘을 수 없는 지경까지 공고하게 구축된다. 주인공 '나'가 그림자를 거부할 수밖에 없는, 나홀로족들이 증가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현대사회의 본질은 개인들로 하여금 소외를 일상처럼 받아들이게 하는 마력과도 같은 것이다. 

 

최근에 정부가 추진중인 엄마 가산점 관련 법안이 논란이 되고 있는 모양이다. 국가정책은 불편부당해야 한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어야 하고 누군가를 위해서 개인이 기꺼이 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 정책이어야 한다. 미혼 여성이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별 논란없이 여성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을까. 증가하고 있는 보편적 복지 요구를 피해가기 위한 꼼수일 뿐이다. 높아만 가는 사회적 장벽 때문에 결혼을 미루고 있는 때로는 포기하고 있는 미혼 여성들에게는 이중의 소외감을 느끼게 할 뿐이다. 게다가 군 가산점 부활까지 추진한다니 꼼수 부리다 도끼자루 썩게 생겼다.

 

'그리고 운다'

 

타인과 소통하고 관계를 맺고 싶지만 스스로 소외를 선택해야만 하는 주인공 '나'는 고독한 군중으로 내몰리는 현대인의 슬픈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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