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독재와 맞짱뜬 <난쏘공> 연작의 첫번째 소설

반응형

뫼비우스의 띠/조세희/1976

 

"미래가 깜깜하다. 난쏘공이 나온 지 30년이 지났지만 철거촌의 상황은 오히려 그 때보다 더욱 심각해졌다."

 

2009 1 '용산 참사' 현장을 찾은 조세희 작가는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참담한 심정을 이렇게 밝혔다. 1970년대 도시 재개발이라는 명목 아래 강제로 쫓겨난 도시 철거민들의 아픔을 그리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하 난쏘공)의 저자 조세희 작가는 우리 사회에 위험성을 알리기 위해 벼랑 끝에 세운 경고 표시가 바로 <난쏘공>이었는데 갈수록 추락을 반복하고 있는 현실을 개탄했다조세희 작가는 또 선진국 운운하면서 여전히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이 자행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도 일갈했다

 

“군대의 총만이 폭력이 아니며 배고파 우는 아이의 울음을 달래지 않고 그냥 두는 것도 폭력이다살게 해 달라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 막고 죽음으로 내몬 우리는 죄인이다경제를 위해 가난뱅이들에게 죽어라 하는 한국 사회는 매일매일 학살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가난뱅이를 두들겨 겨우 유지하는 나라는 선진국이 될 수 없다”

 

조세희 작가의 <난쏘공>은 한국 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박정희 군사정권의 폭압정치가 절정에 달하던 유신시절, '긴급조치 9' 선포로 그 기능이 유명무실화된 언론을 대신해 조세희 작가는 1975 <칼날>을 필두로 도시빈민 문제를 다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연작을 시작했다. 1978 <에필로그>까지 총 12편으로 구성된 <난쏘공> 연작은 저자의 현실참여 의지를 문학적으로 승화시켜 당시 지식인과 청년들 사이에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조세희 작가에게 '용산 참사'는 그야말로 절망에 가까운 심정이었을 것이다

 

 

 

소설 <뫼비우스의 띠> <난쏘공> 연작의 첫번 째 소설이다. 위에서는 <칼날>을 필두로 연작을 시작했다고 했는데 이게 무슨 말일까 싶을 것이다. <난쏘공> 연작의 시작은 <칼날>이 맞지만 1978년 단행본으로 출간되면서 <뫼비우스의 띠> 연작 소설 <난쏘공>의 첫번 째 작품으로 등재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왜 연작의 두번 째 작품인 <뫼비우스의 띠>를 단행본으로 출간하면서 첫번 째 소설로 올려놓았을까. <뫼비우스의 띠>를 읽어본 독자라면 이 소설이 연작의 프롤로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것이다. 왜 연작을 시작하는지, 연작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무엇인지를 밝혀주는 소설이 바로 <뫼비우스의 띠>.

 

<난쏘공> 연작의 소설 속 배경이 '낙원구 행복동'이라는 점은 대단한 역설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뫼비우스의 띠>를 읽으면 연작 소설 <난쏘공>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또 저자가 연작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인지에 대해 짐작하게 된다. 소설은 수학 담당 교사가 두 개의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마지막에 '뫼비우스의 띠'가 가지는 상징적 의미를 설명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물론 두 개의 에피소드는 '뫼비우스의 띠'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저자는 '뫼비우스의 띠'를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

 

면에는 안과 겉이 있다. 예를 들자. 종이는 앞뒤 양면을 갖고 지구는 내부와 외부를 갖는다. 평면인 종이를 길쭉한 직사각형으로 오려서 그 양끝을 맞붙이면 역시 안과 겉 양면이 있게 된다. 그런데 이것을 한 번 꼬아 양끝을 붙이면 안과 겉을 구별할 수 없는, 즉 한쪽 면만 갖는 곡면이 된다. 이것이 제군이 교과서를 통해서 잘 알고 있는 뫼비우스의 띠이다. 여기서 안과 겉을 구별할 수 없는 곡면을 생각해 보자. -<뫼비우스의 띠> 중에서-

 

'뫼비우스의 띠'는 흑백 논리, 모든 사물에는 안과 밖이 존재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도구라고 할 수 있다. 첫번 째 에피소드에서 두 아이가 같이 굴뚝 청소를 했는데 얼굴이 더러운 아이가 씻을 거라는 학생들의 예상과 달리 교사는 깨끗한 아이가 더러운 아이를 보고 자기도 더럽다고 생각해서 오히려 얼굴이 깨끗한 아이가 씻는다는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우리가 종교처럼 믿고 있는 '권선징악'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배웠던 착한 사람은 행복하게 되고 악한 사람은 불행하게 된다는 교과서적 상식이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즉 비루하지만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도시빈민들은 희생을 강요당하고 이들을 괴롭히는 권력, 악한 사람은 잘 살고 있는 당시 현실에 대한 풍자인 것이다. 한편 고정관념을 깨뜨린다는 것은 다양한 생각에 대한 인정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의미이기도 하겠다

 

두번 째 이야기에서 '뫼비우스의 띠' 현실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대응방식을 보여준다.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앉은뱅이와 곱추가 자신들의 입주권을 헐값에 사들여 폭리를 취한 부동산 업자를 납치해 사기당한 돈을 받아낸 뒤 차와 함께 불태워 죽이게 된다. 공모자였던 앉은뱅이와 곱추는 이 사건을 계기로 서로 등을 돌리게 된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서로에 대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 피해자였던 이들은 정당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살인이라는 끔찍한 사건 앞에서는 가해자로 처지가 뒤바뀌고 만다. '뫼비우스의 띠'는 이처럼 쉽게 알 수 없는 왜곡된 현실을 상징한다. 조국 근대화라는 거창한 명분 아래 진행된 산업화가 사실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탄압의 기반 위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차차 알게 되겠지만 인간의 지식은 터무니없이 간사한 역할을 맡을 때가 많다. 제군은 이제 대학에 가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제군은 결코 제군의 지식이 제군이 입을 이익에 맞추어 쓰여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나는 제군을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 사물을 옳게 이해할 줄 아는 사람으로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이제 나의 노력이 어떠했나 자신을 테스트해볼 기회가 온 것 같다. -<뫼비우스의 띠> 중에서-

 

소설의 마지막에 나오는 교사의 이 말을 통해 저자의 연작 의도가 단순히 왜곡된 현실을 바로 보자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암시한다. 왜곡된 현실을 직시한다는 것은 역지사지(易地思之)에서 시작된다. 지금 내가 행복하다고 해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것은 아니다. 불행한 사람들, 행복을 강탈당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이다.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하고 그들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말자는 저자의 호소일 것이다. <난쏘공> 연작의 시작은 바로 더불어 사는 사회에 대한 저자의 작은 꿈의 여행인지도 모르겠다

 

노구의 몸을 이끌고 '용산 참사' 촛불집회에 빠지지 않고 참여했던 저자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언젠가는 밝은 곳을 향해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 모든 것을 냉소적으로 보기 시작하는 순간 희망은 사라진다. 독재정권 시절에도 우리는 곧 낙원에 도착한다고 믿었다. 독재정권과 비교하면 우리는 지금 낙원에 살고 있지만 앞으로 가야 할 낙원은 더 멀리 있다”

 

더불어 사는 사회, 더불어 행복한 사회는 희망의 끈이 견고해야만 이룰 수 있는 꿈이다. 희망의 끈은 나 아닌 타인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이다그 관심과 참여의 끈이 끊어지는 순간 희망도 사라진다. 탄압의 칼날이 서슬퍼랬던 그 시대에 도시빈민과 노동문제를 문학의 힘으로 독재와 맞짱 떴던 <난쏘공>의 연재는 고통 받는 주변을 돌아보지 못한 소시민들에게 보내는 경종의 메세지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 시작이 바로 <뫼비우스의 띠>였다.

 

*이 포스팅과 관련된 책*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