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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북 리뷰

아Q의 정신승리법은 21세기 중국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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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1881~1936) <Q정전>/1921

 

이 남자가 사는 법은 독특했다. 건달들에게 변발을 잡히고 실컷 두들겨 맞은 후에도 나는 자식에게 맞은 셈 치자, 요즘 세상은 정말 개판이야……라고 생각하고는 스스로 만족해 하며 의기양양했다. 그는 오른손을 들어 자기 뺨을 힘껏 때리고는 때린 것이 자기라면 맞은 것은 또 하나의 자기라고 생각했다. 잠시 후에는 자기가 남을 때린 것으로 간주했다. 맞는 와 때린 를 분리하니 분노와 굴욕감을 느낄 필요도 없었다. 오히려 자기가 누군가에게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으니 그에게는 패배란 있을 수 없었다.

 

소위 정신승리법이라 불리는 이 남자의 사는 법은 금세 사람들에게 노출됐고 이 남자에게 폭력을 휘두를 때마다 이를 교묘하게 이용했다. 분노도 굴욕도 패배도 느끼지 못한 이 남자의 정체는 성도 이름도 없이 웨이주앙의 지주인 짜오 노어른의 허드렛일이나 해주고 날품팔이로 전전하며 집도 없이 웨이주앙 사당에서 살고 있지만 자존심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를 Q’라고 불렀다.

 

러시아의 작가 막심 고리끼(Maksim Gorkii, 1868~1936)가 읽고 눈물을 흘렸다는 루쉰(魯迅, 중국, 1881~1936)의 소설 <Q정전>은 날품팔이 아Q의 이야기다. 1921 124일부터 1922 212일까지 베이징의 신문인 천바오에 연재되었던 <Q정전>은 루쉰의 유일한 중편소설이자 그를 중국의 대표작가로 세계에 알린 작품이기도 하다. 서설이 지나치게 긴 소설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근대화 과정에서 각성하지 못한 중국인들의 우매성을 해부한 중국 현대소설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다.

 

2000년 이상 전제국가를 유지해온 중국은 20세기 들어 혁명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서구 열강의 침략이 한층 더 강화되고 있는 20세기 초 청조의 정치개혁 시도는 뜻하지 않게 국민들의 입헌군주제를 향한 대중운동으로 발전하게 된다. 삼민주의의 제창자 쑨원(孫文, 1866~1925)을 중심으로 한 무장투쟁은 1911년 신해혁명을 통해 동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혁명세력의 느슨한 결속력은 청조로부터 대권을 부여받은 매판적 개혁가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1916)와 타협함으로써 미완의 혁명에 그치고 말았다.

 

소설 <Q정전>은 바로 이 신해혁명을 전후한 중국인의 무력함을 풍자한 소설이다. 루쉰이 비판한 중국인의 전근대적 사고방식은 날품팔이 아Q라는 남자가 사는 법인 정신승리법으로 희화화된다. 서구 열강의 침략에도 패배감이나 굴욕감을 느끼지 못한 채 실체도 불분명한 자존심만을 내세우는 중국인들의 사상적 배후에는 중화사상이라는 낡은 사고방식이 자리하고 있음을 비판한 것이다.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도 불구하고 대국의식에 젖어있는 중국인들을 정신승리법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그러나 정신승리법의 이면에는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소영웅주의가 자리잡고 있음을 아Q를 통해 비판한다.

 

이 왕 털보는 나두창도 있고 수염도 텁수록해서 사람들이 왕라이후(왕라이후)라고 불렀는데 아Q는 거기서 라이 자를 빼고 부르면서 그를 몹시 경멸하고 있었다. Q의 생각으로는 나두창은 이상한 것이라 할 수 없지만 그 구렛나루만은 정말로 신기해서 남의 눈에 꼴불견이었다. 그래서 그는 나란히 앉았다. 다른 건달들이었다면 아Q는 감히 앉을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왕 털보 곁에서 그가 무엇을 무서워하겠는가? 솔직히 말해, 그가 앉아주는 것만으로도 그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이었다. -<Q정전> 중에서-

 

루쉰이 설정한 주인공 아Q의 성격은 복합적이다. Q는 다양한 인물의 합성인 셈이다.주관없이 허투루 사는 것 같지만 때로는 진실한 면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삶에서 이런 진실성은 그리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는 혁명당을 보고 두려움을 느끼는 웨이주앙 사람들을 보고는 혁명당이 자기 편이라고 판단하고 만다. 그러나 아Q는 짜오씨 집이 습격당한 날 강도 누명을 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만다. 변화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외세의 침략에 무기력했던 중국인들의 혼란상이 바로 아Q의 복합족인 성격으로 형상화시킨 것이다.

 

강도 혐의로 잡혀간 아Q가 서명을 요구받고 글자를 몰라 당황하는 장면은 당시 중국인의 무지몽매함을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Q는 동구라미를 그리려 했지만 붓을 잡은 손이 떨리기만 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종이를 바닥에 펴주었고, Q도 엎드려서 평생의 힘을 다 쏟아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는 남들에게 웃음거리가 될까봐 겁이 나서 동그라미를 그리려고 애를 썼지만 그 가증스러운 붓은 몹시 무거울 뿐만 아니라 통 말을 듣지를 않아서 벌벌 떨며 동그라미를 거의 완성하려는 순간 바깥쪽으로 빗나가 호박씨 모양이 되어버렸다. -<Q정전> 중에서-

 

한편 루쉰은 서구 열강의 침략의 대응하는 무지한 중국인들과 함께 비루한 중국인의 삶의 원인에 대한 비판의식도 빼놓지 않는다. 바로 웨이주앙의 지주인 짜오 노어른의 등장이다. 루쉰의 이런 비판의식은 짜오씨 집이 강도당했을 때 모두 기뻐했다는 마을 사람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Q가 사형되던 날 총살은 참수만큼 구경거리가 되지 못한다는 마을 사람들의 불만을 통해 여전히 민중적 자각의 부재가 아Q로 대표되는 중국인의 불행임을 보여준다. 날품팔이 아Q의 죽음에 연민의 정이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Q의 정신승리법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무기력함은 100년이라는 세월을 거쳐 혁명보다 더 혁명적인 변화의 길을 걷고 있다. 무기력한 중국 대신 세계 질서를 재편할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의 핵으로 등장하고 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당시 사회주의 국가 중국이 공자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듯이 중국은 사회주의라는 견고한 체제 위에 자본주의를 덧칠해 경제는 물론 모든 분야에서 세계의 중심국가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100년전 낡은 고전적 가치를 담고 있던 정신승리법은 21세기 막강한 경제력을 등에 업고 무기력 대신 역동성과 야욕으로 재무장해 세계를 호령하던 시절의 중화사상을 노골화화하는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중국의 재무장된 중화사상은 우리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왜곡을 서슴지 않고 있지만 우리의 대처는 무기력하기만 하다. 게다가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압박에 다양한 선택을 강요받는 현실에 처해있다. 그러나 이런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채 우물 안 개구리에 머물러 반목과 대립으로 허송세월하고 있는 우리에게 루쉰이 20세기 초 중국인들의 삶의 방식이라고 비판했던 정신승리법은 결코 남 얘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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