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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책 이야기

내 청춘의 갈증을 채워줬던 장편소설 5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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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대학생들에게도 낭만이라는 게 있을까 궁금하다. 현실을 너무 모른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부모 등골 휘게 만드는 등록금, 사회에 나오기도 전에 신용불량자가 되어야만 하는 현실, 오히려 낙타의 바늘구멍 통과가 더 쉬워 보이는 취업전쟁. 청춘의 대명사처럼 통용되던 낭만이 사치로 전락해 버린 현실에 낭만 운운한다는 것 자체가 괜한 미안함에 고개를 숙이게 만든다. 자기 계발서가 범람하는 현실도 아픈 청춘들의 자화상이 아닌가 싶다. 

돌이켜보면 내 대학시절은 그나마 낭만의 흔적들이 남아있었지 싶다. 당시 낭만이란 단순히 젊은 날의 만끽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현실과 미래의 고민을 유토피아적 상상으로 채워갔던 것도 낭만의 일종이었을 것이다. 장장 12년을 새장 속에 갇혀 살아야만 했던 청춘에게 새장 바깥에 존재하는 세계는 그야말로 신선함이기도 했고 충격이기도 했다. 특히 교과서의 죽은 지식은 나뿐만 아니라 많은 청춘들에게 진시에 대한 갈증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런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열심히 시위대열에 합류해 보기도 했고 치열한 삶의 현장들을 찾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책은 눈으로 본 전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체험들을 체계화하고 나름대로의 삶을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인문학 독서 써클에 가입해 치열한 토론을 즐겼던 것도 그런 과정의 일부였을 것이다. 조금은 딱딱했을 단체활동 대신 동네 서점 한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읽었던 소설들도 있다. 대학생이라면 필독서처럼 여겨졌던 <삼국지>도 제대로 완독해보지 못한 내가 <삼국지> 이상의 두께로 두툼했던 대하소설들을 정신없이 읽어나간 데는 그 시절, 청춘이 가지는 열정은 아니었을까.

조정래의 <태백산맥>/전 10권

중학 시절인가 서정윤의 <홀로서기>란 시집이 크게 히트했던 적이 있다. 시집으로서는 사상 유례없는 출판 기록을 세웠던 책이다.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은 <홀로서기>를 넘어서 1천만 부라는 한국출판 사상 초유의 기록을 세운 소설이다. 그것도 단행본이 아닌 10권에 달하는 장편대하소설이라는 점에서 가히 신드롬이라 할만 했다.

1948년 여순사건에서부터 분단이 고착화된 1953년 휴전까지를 배경으로 한 <택백산맥>은 민족 분단의 문제를 문학으로 승화시켰다는 평가와 함께 우리사회에 잠재돼 있던 이념 갈등을 다시 한번 수면 위로 떠오르게 했던 작품이기도 했다. 하나의 소설을 두고 그렇게 기나긴 법정 분쟁이 일어났던 일도 드물 것이다. 훗날 영화화되기도 했던 <태백산맥>은 20세기 한국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소설임에 틀림없다.

민족 분단의 삶을 날줄과 씨줄로 엮어 민중의 상처와 아픔을 감싸고자 하는 베짜기 작업이 어떻게 종합되고 통일을 이루어, 잘려진 태백산맥의 허리를 잇는 데 얼마나 기여할지는 나도 잘 모른다. 그 짐을 나는 지고 있는 것이다. 민족의 '허리잇기' 염원이 언젠인가는 성취될 것을 믿으며, 앞으로도 동반자 없는 등반을 계속해나가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태백산맥> '작가의 말' 중에서-

조정래의 <아리랑>/전 12권


<태백산맥>이 민족분단의 상처에 메스를 가한 소설이었다면 조정래의 또 다른 장편소설 <아리랑>은 동학혁명 이후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에 이르는 한국 근대사의 기록으로 굴절된 현대사의 원인을 더듬어가는 소설이다.

소설 <아리랑>은 나에게 특별한 기억이 있는 소설이다. 1994년 최초로 출간된 <아리랑>의 존재를 고등학교 때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시절 국어 선생님이 소설가였는데 어느날 조정래 작가를 만나러 간다며 당시에는 가제였던 '아리랑'에 대한 얘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아마 내가 살던 지역이 일제 강점기 당시 대표적인 일제의 수탈현장으로 조정래 작가가 답사 차원에서 수차례 방문하지 않았나 싶다. 

<아리랑>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일제의 탄압에 우리 민족이 떠돌아야만 했던 중국이나 미국, 러시아, 동남아 등 방대한 지역들이 배경으로 등장하고 있다.

역사는 과거와의 대화만이 아니다. 미래의 설계가 또한 역사다. 우리는 자칫 식민지 시대를 전설적으로 멀리 느끼거나 피상적으로 방치하는 잘못을 저지르기 쉽다. 그러나 민족분단의 비극이 바로 식민지 시대의 결과라는 사실을 명백히 깨닫는다면 그 시대의 역사를 왜 바르게 알아야 하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아리랑> '작가의 말' 중에서- 

이은성의 <동의보감>/전 3권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은 <태백산맥>이나 <아리랑>에 비해 비교적 짦은 단편소설로 흥미진진한 구성 탓인지 수차례 반복해서 읽었던 기억이 있다.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의 불꽃같은 일대기를 그린 소설로 병들어 고통받는 민초들에 대한 절절한 애정이 그려져 있다. 아마도 소설 <동의보감>은 MBC 드라마 '허준'을 통해 더 독자들에게 가깝게 다가오지 않았나 싶다. 죽음을 앞둔 유의태가 제자 허준에게 자신의 신체를 해부용으로 사용해 달라는 유언과 허준이 눈물을 머금고 스승의 신체를 해부하는 장면은 소설과 드라마의 압권 중 압권이었을 것이다.

물론 소설이기에 실제 허준의 일대기와는 차이가 많다. 오히려 민중의학을 실천했던 역사 속 참의료인이라면 다산 정약용이 남긴 책들에 등장하는 '몽수 이헌길'이라는 사람이 있다. 다산의 저서 말고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 이름없는 의료인이지만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의학적 지식을 고통받는 민중들에게 아낌없이 베푼 참의료인으로 그려지고 있다.
 
16세기 말! 조선왕조 중엽의 두터운 신분차별 속에서 천업의 자식이라는 미천한 출신으로부터 정일품 보국숭록대부에 양평군이라는 작호까지 받았던 인물! 무덤 속으로부터 생명을 끌어내고 이 나라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까지 사랑했던 사나이! -<동의보감> '서설' 중에서-

김중태의 <해적>/전 10권


극장가에서 '조폭 영화'는 흥행 보증수표로 통한다. 조폭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의리에 죽고 의리에 사는 그야말로 '멋진 남자'로 그려진다. 특이하게 외화 중에는 조폭 영화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물론 1980년대 홍콩 느와르를 주도했던 영화들이 있긴 했다. 홍콩 영화에서 폭력 조직은 대부분 권선징악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국내 조폭 영화들은 조폭이 사회의 불의에 대항해 싸우거나 개과천선하는 선의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는 것에 심각성이 있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폭력 조직이 성행하고 그런 세력들을 척결하기 위해 '전쟁'이라는 용어까지 서슴치 않고 있다. 그러나 폭력 조직은 척결은커녕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왜. 그것은 바로 조직 폭력이 권력과 유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김중태의 소설 <해적>은 1970~80년대를 주름잡았던 서방파, 오비파, 양은이파 등 조직폭력단의 계보와 이들간의 혈투, 정치권력과의 공생관계를 흥미진진하게 엮어내고 있다. 한국 현대정치사를 얘기할 때면 결코 빠질 수 없는 폭력 조직이 권력의 비호 아래 성장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이기도 하면서 정부가 내세운 '폭력과의 전쟁'이라는 말이 얼마나 허구에 그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소설 <해적>에서는 구국의 결단이라는 미명 아래 나라를 총칼로 뒤엎고 근대화, 선진화의 명분으로 민중을 빈사상태로 몰아가며 우민화해가는 무소불위의 절대권력과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할 정도로 우후죽순 활개치던 조직폭력배들의 필연적인 야합, 그리고 타락의 극치로 치닫는 부의 적나라한 삼각관계의 실상이 나위 없이 파헤쳐질 것이다. -<해적> '작가의 말' 중에서-  

권운상의 <녹슬은 해방구>/전 9권

대학 새내기 시절 해방이라는 말은 역사적, 정치적 의미를 떠나 짧지 않은 시절을 갇혀 살았다는 자괴감으로 일종의 쾌감을 주는 단어이기도 했다. 서점 책장 높다른 곳에 위치한 <녹슬은 해방구>에 시선이 간 것도 어쩌면 의식의 발로라기보다는 그런 쾌감이 느껴지는 제목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소설 <녹슬은 해방구>는 대학 시절 유신체제 반대운동을 하다 철창 신세를 지기도 했던 저자 권운상이 정치 사범들과 분리되었던 사상범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책으로 엮은 대하소설이다.

그가 교도소 문을 나서면서 거기서 보내고 있는 사람들(사상범)의 삶과 청춘과 투쟁, 그리고 우리 역사의 빈 자락한 무더기를 품고 나왔다고 밝혔듯이 <녹슬은 해방구>는 1980년대 초 '모스크바'라 불리던 양심수 사동에서 수십년간 복역한 장기수들의 이야기다. 누가 그랬던가? 몸은 가둘 수 있어도 양심은 가둘 수 없다고. 1990년대 급격하게 해체의 길로 접어든 이념 논쟁으로 지금 읽으면 조금은 진부해 보일 수도 있지만 한국 현대사의 또 다른 상처이자 맹목적인 이데올로기적 접근으로 여전히 미완의 상태로 남아있는 양심수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이다.

안타깝게도 잦은 이사 탓에 지금은 이빨이 빠진 채 내 책장 다른 책들 사이에 끼어 있지만 가끔 들춰볼 때마다 대학 시절 고민의 흔적들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바로 그것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비둘기 날아가는 바깥 세상에 대한 그리움도 없고 면회 오는 가족조차 없이 잊혀져가는 자유를 꿈꾸는 그들-그들을 참으로 자유롭게 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그들의 시간이 정지되어 버렸던 그날까지 그들이 살아왔고 싸워왔던 일들을 생생히 전달하는 것이리라. -<녹슬은 해방구> '책 머리에' 중에서-

포스팅을 하기 위해 자료 사진을 찾으로 인터넷 서점을 돌아다녀 보았지만 너무 오래된 책들인 탓에 이미지를 구할 수 없었다. 책장을 뒤져 직접 스캔 작업을 하면서 누렇게 퇴색된 책장에서 풍겨오는 쾌쾌한 내음들이 결코 싫지만은 않다. 어쩌면 20년의 세월을 버텨오면서 그 시절 타올랐던 열정과 갈증이 차갑게 식어가고 있음이 느껴지기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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