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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책 이야기

내가 책을 읽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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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루는 어둠이 내리고서야 시작된다. 벌써 2년째다. 토요일을 제외하곤 늘상 다른 사람들이 하루의 노곤함을 풀 시간에 나는 출근 준비를 한다. 어김없이 저녁 여덟 시가 되면 버스에 몸을 싣는다. 특히 일주일의 피로를 풀기 위해 둔산동 일대가 왁자지껄해지는 금요일 밤의 출근은 여간 맥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먹고 사는 방법이 이것밖에 없는 것을. 어쨌든 가방에는 늘 두 권의 책을 넣는 게 출근준비의 전부다. 버스는 항상 맨 뒤에 자리를 잡는다. 직장이 40분 정도 되는 거리의 종점에 가까워 맨 뒷좌석에 자리를 잡으면 타고 내리는 사람들을 의식할 필요가 없어 좋다. 다행히 둔산동에서 신탄진간 버스노선은 이용객이 거의 없어 서서 가는 경우는 드물다. 40분 동안은 책과 벗할 수 있는 꿀맛같은 시간이다.

내가 일하는 곳은 밤새 지게차 소음이 요란하고, 대형 화물트럭들이며 배송 트럭들이 쏘아대는 불빛들로 낮처럼 환하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질흙같은 어둠 속에 이곳만이 낮처럼 밝게 빛나고 분주하게 보일 것이다. 그래도 짬은 있다. 야참 시간도 있고 중간 중간 휴식 시간도 꽤 많고 길다. 이 짬이면 인터넷 기사에 빠지기도 하고 휴대폰으로 게임을 즐기기도 한다. 또 이런저런 주제로 아줌마들 못지않은 수다가 이어지기도 한다. 달콤한 단잠에 빠지기도 한다. 나는 버스에서 못다 읽은 책을 이 시간에 읽는다. 뒷부분이 궁금해서 이대로 새벽을 맞으면 뒷일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하고 화장실을 나온 듯 찜찜해서다. 짬짬이 보는 책의 달콤함은 경험해 보지 않으면 모를 것이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한다'는 표현이 귀에 생생한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569~1618)이 그랬다잖은가! '독서를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낙원'이라고. 심지어 김대중 전대통령(1924~2009)은 책을 읽기 위해 다시 감옥에라도 가야겠다는 우스갯 소리를 했다니 독서의 매력은 마력이 아닌가싶다.

그런데 요즘 내가 고민 아닌 고민에 빠졌다. 블로그를 하면서 책읽는 시간보다 글을 쓰는 시간이 훨씬 많아졌다는 것이다. 이 나이에 전문 작가를 꿈꾸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게다가 '내가 왜 책을 읽지?'하고 스스로에게 종종 묻기도 한다는 것이다. 새삼스럽다. 수십년간 해오던 취미생활을 이제와서 그만 둘려는 것도 아니고 이제는 그만 둘 수도 없을만큼 생활의 일부가 되어있는데 말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런 의문은 늘 있어왔다. 아마도 책을 읽는 것에 비해 읽은 후의 재해석을 얕잡아 보는 데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허균이 말했단다. 인생을 사는 데는 네 가지의 즐거움이 있다고.

"독서는 사람에게 이로움을 주고 해로움을 주지 않는다. 자연은 사람에게 이로움을 주고 해로움을 주지 않는다. 바람과 달과 꽃과 대나무는 사람에게 이로움을 주고 해로움을 주지 않는다. 고요하게 지내는 삶은 사람에게 이로움을 주고 해로움을 주지 않는다." -'독서신문' 발췌-

독서의 유형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전문지식을 쌓기 위함이고 또 하나는 교양을 함양하기 위함이다. 어느덧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나는 분명 후자 때문에 독서를 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둔한 자문이고 자답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는 각자 존재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산악인들에게 왜 그렇게 힘들게 산을 오르냐고 물으면 '거기 산이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잖은가. 나의 독서생활도 마찬가지일게다. 누군가 읽어주길 바라고 존재하는 책이 있기 때문에. 허균이 말한 독서의 즐거움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전장에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는 나폴레옹(1769~1821)도 이런 즐거움의 유혹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문자의 발명이라는 전무후무한 업적을 남긴 세종대왕(1397~1450)이 어린 시절 병을 앓으면서까지 독서 삼매경에 빠진 것도 이런 이유겠지 싶다. 

한편 우리가 혁명가로만 알고 있는 마오 쩌뚱(1893~1976) 또한 대단한 독서광이었다고 한다. 그는 식음을 전폐하면서까지 책을 읽었고 또 그가 읽은 책을 측근들에게 권유했다고 한다. 심지어 마오 쩌뚱은 그가 다시 10년을 더 산다면 9년 하고 359일을 배운다고 했다니 독서에 대한 그의 열정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에게는 독특한 독서 철학이 있었다고 한다. 그가 즐겨 인용했다는 맹자의 말에서 그만의 독서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서경(書經)을 그대로 믿는다면 <서경>이 없느니만 못하다."

이 말은 책을 읽되 맹신하지 말고 자신만의 재해석이 필요하다는 말일 것이다. 이와 반대로 송도삼절의 하나인 서경덕(1489~1450)은 책을 읽기 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 대한 깊이있는 관찰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했단다. 그래서일까. 서경덕은 절세미인 황진이의 유혹에도 하룻밤의 사랑이 아닌 영원한 벗이 되었다고 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블로그 때문에, 늘어나는 글 쓰는 시간 때문에 책읽는 시간이 줄었다는 나의 고민은 또 그런 요즘의 내 생활 때문에 '왜 책을 읽지?' 라는 나와의 대화는 무릇 자기변명에 불과하고 말았다. 그렇다. 책 읽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그 즐거움을 제대로 만끽하지 못한 데서 오는 어리석은 짓이다. 그저 즐길 뿐이다. 즐기면서 성장하는 것이다. 물리적 성장은 때가 있겠지만 정신적 성장이야 죽는 그날까지 인간만이 가지는 특권일 것이다. 

사실은 인터넷 서핑을 하다 문화관광부가 2012년을 '독서의 해'로 지정했다는 기사를 보고 문득 떠오른 자문이었다. 오늘은 매주 토요일을 제외한 한 달에 두 번 주어지는 휴일 중 하루다. 오랫만에 서울 나들이를 할 것 같다. 책장과 그 주위를 무질서하게 나뒹굴고 있는 책 중에 오늘 기차 여행의 동반자를 고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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