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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북 리뷰

교과서에서는 가르쳐주지 않은 인류 최초의 대서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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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룩의 왕 길가메시(Gilgamesh)는 ‘영원한 생명’을 찾아 죽음을 불사한 모험을 했다. 그의 또 다른 자아(自我)이자 친구인 엔키두(Enkidu)와 함께... 과연 그는 모험을 통해 불사의 무엇을 구했을까? 세상 어느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힘을 가진 길가메시였지만 결국 그도 반신반인(半神半人)인, 인간의 숙명을 갖고 태어난 죄로 생물학적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다. 맞다 생물학적 죽음일 뿐이다. 그가 그토록 욕구했던 ‘영원한 생명’은 4,000년 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흙 속에 잠들어 있었지만 21세기 나와 함께 호흡하고 있으니 어쩌면 그의 불같은 꿈이자 욕망이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불사의 생명을 얻고자 끝없는 여행을 했던 길가메시의 땅에 지금은 사치스런 ‘영원한 생명’보다 내일의 태양마저 불안한 시선으로 희망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 바로 [길가메시 서사시]의 주무대인 이라크의 민중들이다.

어릴 적 [아라비안 나이트]에 소개된 동화(?) [신밧드의 모험]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신밧드의 모험]에서 주인공인 신밧드가 모험을 시작한 곳인 바스라 항구가 있는 곳이 바로 이라크이다.

아담과 이브의 에덴동산이 있던 곳도 이라크 남부 도시 쿠르나로 알려져 있다. 세계 4대 문명 중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근원지인 이라크는 역사와 신화의 현장이요, 인류의 위대한 자산이다.


그러나 [길가메시 서사시]의 토판이 묻혀있던 이라크는 [아라비안 나이트]의 신비도 뒤로 한 채, 미국의 계속된 침략전쟁으로 죽음의 땅이 되어가고 기나긴 인류 역사의 현장은 폐허로 변하고 있다. 길가메시의 영원한 삶에 대한 치열한 욕망이 이라크인들이 갈망하는 평화에로의 길에 작은 힘이라도 되어 주길 기대해 본다. 

 

[갈가메시 서사시]가 흔히 인류 최초의 서사시로 알고 있는 호메로스(Homeros)의 [일리아드]나 [오딧세이아]보다 무려 1,500년 전에 기록되었음에도  이제야 이 책을 읽게 됨에 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서구 중심적 사고방식으로  인해 동양의 문화와 가치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오히려 서양에서 그동안의 물질적 진보에 대한 대안으로 동양 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늘어나고 있다지 않은가!

2~3,000년 전에도 동서간의 교류가 있었을까? 역사의 개연성에 비춰 본다면 충분히 가능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서양인들에게 수 천 년간 회자되었던 그리스 신화나 그 그리스 신화를 문자화 한 호메로스나 플라톤의 작품들도 직간접적으로 길가메시 신화를 비롯한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노아의 방주 얘기도 [길가메시 서사시]에 등장하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대홍수에서 유래한다고 하니 이라크인의 조상들은 동서양 문화에 적잖은 영향을 행사했다고 단언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길가메시의 무모한(?) 도전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기에 담담히 받아들여야만 하는 죽음이라는 비극을 통해 결코 비극으로 끝낼 수 없는 인간의 숙명에 대한 치열한 투쟁이다. 책의 끝부분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오, 길가메시여, 쿨랍의 주여, 당신의 이름이 영원할지어다”

인간의 운명이 비극일 수 만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꽃이 지지 않고 사계(四季)를 지속하고 억겁을 화려함으로 물들인다면 꽃을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까? 꽃은 져서 아름답다.

우룩의 위대한 왕 길가메시도 인간으로서 자신의 운명에 대해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러나 창조의 여신 아루루(Aruru)가 대지의 신 아누(Anu)의 형상을 본 따 만든 엔키두가 창녀의 유혹으로 야만인에서 문명인이 되자 나약해지고 안일해진 모습을 보며 ‘영원한 생명’에 대한 욕망을 품게 된다. 엔키두는 똑같이 아누의 형상을 본 따 만든 길가메시의 분신이자 친구였으니까..

향나무 숲을 지키는 훔바바(Humbaba)를 쓰러뜨리고 사랑의 여신 이시타르(Ishtar)가 내려보낸 하늘 황소(가뭄의 인격화)를 죽이는 등 신에 대한 도전을 거듭한 길가메시와 엔키두는 엔키두의 죽음을 시작으로 어쩔 수 없는 인간으로서의 운명을 살게 된다.


친구의 죽음으로 영생에 대한 갈망은 더욱더 솟구쳐 오르지만 인간으로서는 유일하게 대홍수에서 살아남아 신들의 모임에 참석하고 있던 우투나피시팀(Utunapishtim)의 작은 요구(여섯 날과 일곱 밤을 잠자지 안고 견뎌내는)마저도 참아내지 못하고 그나마 받은 불로초(不老草)마저 뱀에게 빼앗겨 버린 길가메시는 끝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 운명의 신 남타르 품으로 돌아가게 된다.


욕망은 신에게는 없는 인간에게만 내재되어 있는 욕심이자 희망이다.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으면서도 ‘영원한 생명’에 대한 길가메시의 모험과 투쟁은 생물학적 영생 대신 우주적 의미의 ‘영원한 생명’을 얻어 지금 나와 같이 호흡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 것이다. 

몇 해 전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이 고대 불교 유적들에 무차별적으로 포탄사격을 가하는 장면을 보았다. 인류가 현재와 미래만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면 가볍게 보아 넘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은 내일에 가면 과거로 기록된다. 인간에게 어제 없는 오늘은 없다. 과거는 현재와 미래의 지침서이자 견고한 뿌리이다.

[길가메시 서사시]를 통해 새삼스레 과거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은 길가메시가 과거에 살았던 땅에 사는 오늘의 후손들이 과거를 통해 미래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에서다.

전쟁은 과거의 기억도 현재의 일상도 미래의 두려움도 되어서는 안된다.

교과서에도 없고 학교에서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길가메시 서사시]는 문자로 기록된 인류 최초의 대서사시이다. 머지 않은 장래에 교과서에서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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