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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북 리뷰

법정스님은 왜 이 책을 평생 간직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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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을 때에는 가진 것이 없을 것이므로 무엇을 누구에게 전한다는 번거로운 일도 없을 것이다. 본래무일물(
本來無一物)은 우리들 사문의 소유 관념이다. 그래도 혹시 평생에 즐겨 읽던 책이 내 머리맡에 몇 권 남는다면, 아침 저녁으로 신문이오하고 나를 찾아 주는 그 꼬마에게 주고 싶다.’ –법정스님의 『무소유』 중 <미리 쓰는 유서> 중에서-

 

무소유를 몸소 실천하고 입적한 법정스님의 소박한 소망이 끝내 이루어졌다고 한다. 법정스님의 49 3재가 치러진 지난 331, 법정스님이 말하던 그 꼬마가 중년이 되어 나타나 스님이 남긴 6권의 책을 전달받았다고 한다. 이 중년의 신사처럼 행복한 이가 또 있을까? 이승에서의 빛나는 삶만큼이나 입적 후에도 각박한 세상을 아름다운 이야기로 촉촉이 적셔준 법정스님에게 절로 옷깃이 여미어진다.
 

도대체 어떤 책들이길래 초월적인 삶을 살았을 것 같은 법정스님이 평생 간직하고 즐겨 읽었을까?그의 삶 자체가 수만 권의 책으로도 담아내기에 부족했을 것 같은데 말이다. 레바논의 시인이자 화가인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 1883~1931)이 쓴 『예언자』가 바로 법정스님의 평생 반려자였던 6권의 책 중 하나다.
 

법정스님은 왜 이 책을 평생 간직하며 삶의 길라잡이로 삼았을까? 『예언자』를 읽어봤다면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이 그리 어려운 숙제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칼릴 지브란이 노래하는 순수와 사랑과 생명이 법정스님의 삶과 닮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법정스님의 무소유 철학과 마찬가지로 칼릴 지브란의 순수와 사랑과 생명은 정신적 깨달음을 넘어 일상과 사회를 바라보는 따뜻하고 냉철한 시선으로 발전하게 된다
 

서양인들에게 알파벳을 전파한 페니키아인의 후손답게 칼릴 지브란이 쓴 시의 행간에는 아침 햇살에 빛나는 이슬처럼 맑고 순수한 기운들이 넘쳐난다
 

『예언자』는 알무스타파라는 예언자가 예언녀 알미트라의 사랑에 관한 질문에 대해 답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어서 결혼, 고통, 우정 등에 대해 참다운 진리를 설파하고 더 나아가 먹고 마시는 것, 의복, 법 등 일상과 관련된 주제들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현실인식을 아름다운 말로 담아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화가이기도 한 그답게 중간중간 삽입된 그의 그림은 환상적이면서도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사실 칼릴 지브란이 얘기하는 주제들은 알고 보면 특별한 게 없다. 문명의 속도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뒤를 돌아볼 여유를 갖지 못한 현대인들에게 잠시 잊고 있었던 영혼의 순수함을 깨우쳐주는 것 뿐이다. 이것이야말로 칼릴 지브란이 위대한 작가임을 보여주는 반증이 아닐까?
 

사랑은 사랑 외엔 아무것도 주지 않으며 사랑 외엔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것.

사랑은 소유하지도 소유당할 수도 없는 것.

사랑은 다만 사랑으로 족할 뿐’ -<사랑에 대하여> 중에서-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에 구속되지는 말라.

차라리 그대들 영혼의 기슭 사이에 일렁이는 바다를 두라.

서로의 잔을 넘치게 하되 한쪽 잔만을 마시지 마라’ -<결혼에 대하여> 중에서-

 
그대 어린이라고, 그대의 어린이는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 열망하는 생명의 아들이요 딸이다.

그들은 그대를 거쳐 왔으나 그대에게 온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비록 그들이 그대와 더불어 있더라도 그들이 그대의 소유물은 아니다’ -<어린이에 대하여> 중에서-
 

칼릴 지브란이 얘기하는 모든 것들은 알무스타파라는 예언자의 말을 빌렸을 뿐 실은 인간들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해답을 찾아가야 하는 것들이다. 모든 진리를 듣고 난 알미트라가 알무스타파를 축복하자 그는 이렇게 얘기한다.
 

말한 자가 나였던가? 나 역시 듣는 이가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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