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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소설로 읽는 영화 서편제의 또다른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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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의 <서편제>/1976년 

영화 '서편제'의 압권은 송화(오정해)와 동호(김규철)가 어느 이름없는 주막에서 해후해 판소리로 대화하는 장면이다. 앞을 보지 못했던 송화는 아버지 유봉(김명곤)을 꼭 빼다닮은 북장단에 오라비 동호라는 사실을 눈치채지만 아랑곳없이 계속되는 그들의 판소리 대화는 온 극장 안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애달픈 소리가 정적을 만드는 순간 여전히 손에 잡히지 않는 한(恨)의 실체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시나브로 분출되고 있음은 극장 안 누구나의 경험이었을 것이다.  

한국영화 최초로 '100만 관객 시대'를 연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는 그야말로 신드롬이었다. 말이 100만이지 1993년 당시 관객수 집계가 체계화되지 못해 개봉관에 한정된 통계라는 점을 감안하면 요즘 1,000만 영화를 훌쩍 뛰어넘는 사회적 이슈였음에 틀림없다. 눈부신 영상에 녹아든 송화의 소리 대목대목은 우리 전통음악에 대한 그간의 편견을 깨기에 충분했다. 이렇듯 한국영화의 신기원을 이룩한 '서편제'의 원작이 바로 이청준의 소설 <서편제>다.

임권택 감독이 '내 마음의 고향'이라고 극찬했던 이청준은 '남도 사람'이란 제목으로 세 편의 단편소설을 연재했는데 이 세 단편은 임권택 감독에 의해 모두 영화화되기도 했다. 영화 '서편제'는 '남도 사람' 연재 소설 중 <서편제>(1976)와 <소리의 빛>(1978)을 원작으로 만들어졌고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은 '남도 사람' 시리즈 마지막 편인 <선학동 나그네>(1979)를 원작으로 만든 영화다.

'서편제'라는 동명의 소설과 영화 모두를 아우르는 한 단어는 한(恨)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정서가 '한'이라고는 하지만 정작 설명할라치면 입술만 바르르 떨리게 하는 말이 또 '한'이다.   


도대체 한(恨)이 뭐길래

'몹시 원망스럽고 억울하거나 안타깝고 슬퍼 응어리진 마음'. 사전적 의미의 한은 이렇게 정의된다. 영화 '서편제'에서도 한은 이와 비슷하게 설명된다. 오로지 소리를 위해 딸 송화의 눈을 멀게 한 유봉의 변은 이렇다.

서편제는 말이다. 사람의 가슴을 칼로 저미는 것처럼 한이 사무쳐야 되는데 니 소리는 이쁘기만 하지 한이 없어. 사람의 한이라는 것은 한평생 살아가며 응어리지는 것이다. 살아가는 일이 한을 쌓는 일이고, 한을 쌓는 일이 살아가는 일이 된단 말이다. -영화 '서편제'. 유봉의 대사 중에서-

사전적 의미로만 본다면 한은 과거지향적이고 원한과의 차이가 없어보인다. 응어리진 마음까지가 원한이라면 한은 응어리진 마음의 승화까지를 포함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미래에 대한 내재된 동력으로서의 한이 비로소 성립되는 것이다. 소설 <서편제>의 주인공인 사내는 의붓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꿈꿔왔지만 의붓아버지의 잘못된 행위로 말미암아 용서와 화해라는 한의 진정한 실체를 인식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의 한이라는 것이 그렇게 심어주려 해서 심어줄 수 있는 것은 아닌 걸세·····그보다도 고인한테 좀 미안한 말이지만 노인은 아마 그 여자의 소리보다 자식년이 당신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해두고 싶은 생각이 앞섰을지도 모르는 일일 거네." -소설 <서편제> 중에서-

영화 '서편제'와는 다른 소설 <서편제>의 감동

영화 '서편제'가 한에 무게를 두고 있다면 소설 <서편제>는 한의 승화 즉 죽은 의붓아버지와의 화해를 주제로 하고 있다. 이런 주제의식은 등장인물의 설정에서도 볼 수 있다. 영화에서는 송화가 데려온 딸로 나오지만 소설에서는 사내(동호)가 의붓자식으로 등장한다. 즉 영화에서 송화는 원망스럽고 억울해서 응어러진 마음의 총체가 되지만 소설에서 사내는 의붓아버지 때문에 죽은 어머니로 인해 응어러진 마음을 복수를 통해 해소하고자 한다. 

'이글거리는 태양볕'으로 표현되는 사내의 복수는 의붓아버지의 소리(판소리)에 힘을 잃고 만다. 영화에서 송화의 동호의 판소리 대화가 가장 극적이었다면 소설에서는 바로 이 장면이 아닐까 싶다. 사내의 나약함이었을까? 아니면 한의 실체에 대한 내재된 믿음이 있었던 것일까? 저자 이청준은 사내를 통해 한의 실체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린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 여인이 제 아비를 용서한 것은 다행한 일이었을지 모르는 노릇이지. 아비를 위해서도 그렇고 그 여자 자신을 위해서도 그렇고·····여자가 제 아비를 용서하지 못했다면 그건 바로 원한이지 소리를 위한 한은 될 수가 없었을 거 아닌가. 아비를 용서했길래 그 여자에겐 비로소 한이 더욱 깊었을 것이고······" -소설 <서편제> 중에서-

결국 영화 '서편제'에서 한이 예술로 승화되었다면 소설 <서편제>에서는 의붓아버지에 대한 용서와 화해로 승화됐다고 할 수 있다.

영화 '서편제'에 압도된 탓인지 별다른 기대감 없이 읽었지만 영화적 상상과는 또다른 감동으로 충만했던 소설이 <서편제>가 아니었나싶다. 전형적인 액자소설 형식을 취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실체에 접근해가는 과정이 긴장감마저 준다. 소설 마지막에 주막집 소리하는 여자가 사내의 정체를 알게 되는 장면에서는 북장단을 듣고 오라비 동호를 눈치 챈 송화가 오버랩되기도 한다.

한가지 짚고넘어가야 할 것은 한의 실체가 응어러진 마음에서 용서와 화해까지를 포괄한다면 그 전제는 진심어린 사과여야 한다는 점이다. 사내가 복수의 결정적 순간에 머뭇거린 것도 의붓아버지의 애절한 소리에서 또다른 한, 죽은 아내와 남겨진 자식들에 대한 미안함이 '이글거리는 태양볕'에 녹아들었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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