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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아다다의 죽음과 황금주의 비판의 불편한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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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용묵 <백치 아다다>/1935년

언젠가 노래방에서 일행 중에 한 명이 '초여름 산들바람 고운 볼에 스칠때'로 시작하는 애절한 노래를 들은 적이 있다. 마지막에는 '
말하라 바다 물결 보았는가 갈매기 떼, 간 곳이 어데메뇨 대답 없는 아다다야'로 끝나는데 그 친구가 노래를 잘 불러서인지 아니면 가사 때문인지 광란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던 노래방이 일순간 숙연해 졌다. 계용묵의 소설 <백치 아다다>를 소재로 만든 대중가요였다. 그때까지 <백치 아다다>에 관한 교과서적 지식 정도는 갖고 있었다. 황금만능주의를 비판한 소설이라는...애절한 노래의 여운이 오래 남아서였을까? 며칠 후 서점에 들렀다 구석에 쪼그려앉아 읽었던 책이 <백치 아다다>다. 이런 이유로도 책을 읽나보다.

작가 계용묵은 <백치 아다다>를 비롯해 <인두지주>, <캉가루의 조상> 등에서 보는 것처럼 신체 불구자의 내면의식을 주제로 한 소설들을 많이 발표했다. 계용묵은 왜 소설 속 주인공으로 신체 불구자를 주목했을까? 계용묵뿐만 아니다. 나도향의 소설에서도 벙어리 삼룡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들 장애인 주인공들이 갖고있는 공통점은 모두 순수하다는 것이다. 온전한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인간들이 각기 신체가 갖는 특성들을 이용해 욕망과 타협과 변절을 서슴치 않는 것에 반해 장애인의 경우 불완전한 신체적 특성으로 인해 마음과 정신으로 소통한다는 점에서 맑고 순수한 의식을 대비시키고자 하는 것일게다. 한편 장애인의 설정은 모순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정상인의 또다른 자화상인지도 모른다.

소설 <백치 아다다>에서 주인공 아다다를 둘러싼 인물들은 정상적인 신체를 가지고 있지만 그들의 정신만은 아다다의 신체적 결함보다 더한 장애를 가지고 있다.

말못하는 딸을 부끄러워하는 아다다의 부모와 물질의 노예가 되어버린 남편, 점차 아들의 황금만능주의에 물들어가는 시부모. 이들의 아다다에 대한 시선은 늘 폭력으로 이어진다. 또 아다다의 삶에 대한 열정과 사람을 바라보는 따뜻함은 갑자기 찾아온 물질적 풍요 속에 무가치한 것으로 폄하되고 만다. 

왜 하필

아다다의 죽음은 황금만능주의에 젖어있는 근대 사람들에 대한 저항의식의 표현이다. 돈으로 인해 폭력을 견디며 살아온 아다다에게 새 남편 수롱이 밭을 사기 위해 모아둔 돈은 일종의 트라우마였다. 저자의 표현대로 한다면 수롱이 의도적으로 아다다에게 접근했다고는 하나 그의 행동은 삶을 영위하기 위한 정상적인 행위일 수 있다. 오히려 아다다의 부모와 전 남편으로부터 당한 폭력에 대한 기억이 수롱의 정상적인 행위마저 거부하고 비극을 맞이하는 것이다.

왜 하필 많은 소설에는 물질문명과 황금만능주의를 풍자하기 위해 물질적 빈곤층을 등장시킬까?  불편하다. 인류 역사를 통해 소수 지배권력에 의해 각인된 학습효과라고 할 수 있다. 물질의 무용화와 정신을 역설하는 자들의 공통점은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정작 최소한의 물질적 풍요도 누리고 있지 못한 피지배계급은 그들이 얼키설키 쳐놓은 올가미 속에서 물욕이 마치 죄악인양 받아들이고 있다. 피폐한 삶을 살아가는 서민들을 향해 정신을 강조하는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소위 사회지도층이라고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질적 풍요는 아니더라도 물질적 안정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정신적 풍요를 추구한다는 종교도 마찬가지다. 역사를 두고 종교가 지배계급의 범주를 벗어난 적이 없다. 지배계급의 정치적 야망에는 늘 종교가 홍위병 역할을 했다. 전에도 그랬지만 최근에 종교는 거대한 자본으로 성장하고 있다. 며칠전 세습과 족벌관리체제로 비판받아온 대형교회 목사가 신도들을 향해 눈물의 큰절을 했다는 사건을 두고 종교적 양심을 운운하는 보도가 많더라. 그 종교인의 속죄의식이 세습과 족벌관체제의 포기였을까? 물론 두고 볼 일이지만 현재까지는 그동안의 행위에 대한 양해를 구하는 수준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루하루 먹고사는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정신적 풍요를 강조하며 헌금을 받고 시주를 받지만 정작 종교는 그 돈으로 부를 축적하고 있는 게 어제와 오늘의 진실일 뿐이다. 

아다다와 수롱에게 황금만능주의가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극적 재미와 독자와의 공감을 이루고자 하는 설정이라지만 철저한 지배논리에 놀아나는 나와 우리와 작가의 슬픈 자화상이다. 부의 축적을 통해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는 소수를 위해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황금만능주의에 빠져있다고 자아비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월드컵에 출전해 예선 탈락한 축구 대표팀을 향해 정신력이 부족해서였다고 비판하는 꼴이다. 눈꼽만큼의 지원도 없으면서 말이다.  

아다다를 죽음으로 내몬 것은 황금만능주의가 아니라 황금만능주의를 비판하는 불편한 진실이다. 아다다에게 조개나 굴같은 것을 캐어서 그날그날을 살아가라고 강요하는 것은 너무 잔인한 폭력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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