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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시인의 마을

에반젤린, 기억 속에 담아둘 걸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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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펠로 시집>

아카디아의 처녀 에반젤린은 대장장이의 아들 가브리엘 라주네스와 결혼할 예정이었으나 인디언 전쟁 중에 영국군이 식민지 보호의 목적으로 프랑스 거주인들을 추방함으로써 이들 연인들은 헤어지게 되었다. 에반젤린은 가브리엘을 찾아 미시간의 숲 속을 방황하다가 늙어 필라델피아에서 수녀의 도움으로 정착하게 된다. 그 때 질병으로 신음하는 한 노인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그녀가 그토록 오랫동안 찾고 있었던 옛 연인 가브리엘이었다. 그러나 그가 죽자 그녀도 충격으로 사망하여 그들은 나란히 묘지에 묻히게 된다.

에반젤린의 가브리엘을 향한 가슴시리도록 슬픈 전설을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10월의 거센 바람이 회오이바람처럼 휩쓸며 먼 바다로 흩날릴 때
그들은 먼지와 낙엽처럼 흩어졌다.
남은 것이라곤 아름다운 그랑프레(큰 목장) 마을 전설의 유해 뿐.
희망을 가지고 견딜 줄 아는 사랑을 믿는 자여,
여인의 헌신이 지닌 아름다움과 힘을 믿는 자여,
이 숲의 소나무들이 노래 부르는 슬픈 전설에 귀기울이시라.
행복한 마을 아카디아의 사랑 이야기에 귀기울이시라.
-[롱펠로 시집] <에반젤린> 중에서-

내가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넘어가던 시절 '둘이 만나 서는 게 아니라 홀로 선 둘이 만나는 것'이라는 서정윤 시인의 <홀로서기>는 그야말로 열풍이었다. 당시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 또래들은 서정윤 시인의 <홀로서기>를 다 외우지는 못해도 이 구절쯤은 러브레터에 단골메뉴로 사용하곤 했다. 게중에는 짧지 않은 시 전체를 다 외우고 있는 열혈독자도 있었다. 그 와중에 친구 한 녀석이 편지

지에 모양 낸 글씨로 꼼꼼이 적은 시 한편을 보여주었다. <에반젤린>. 그 친구는 죽을 때까지 단 한 사람만을 사랑했던 에반젤린 전설을 얘기해 주었다. 친구와 나는 그 시를 외우고 또 외웠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기필코 외워야만 했다.

20년을 훌쩍 넘어 애써 외웠던 시였건만 '에반젤린'이라는 한 여인의 이름만 남기고 기억 저 편으로 사라져 버린 시 <에반젤린>. 그 때의 감흥을 되살리려 해도 좀처럼 몰입하기 힘든 건 크로노스의 저주일까? 아니면 삶의 무게에 짓눌린 인생 때문일까?

미국의 대표시인 롱펠로(Henry Wadsworth Longfellow, 1807~1882)는 인생을 예찬한 시인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에반젤린>이라는 시로 기억되고 있다. 아마도 10대의 감성과 맞아떨어져서였을게다. 여하튼 롱펠로는 그의 대표작 <인생찬가>에서 보듯 덧없는 세월 적극적으로 살 것을 노래한다.

인생은 한낱 헛된 꿈이라고
내게 슬픈 노랠랑 부르지 말라!
잠자는 영혼은 죽은 영혼
사물은 보기와는다른 것.
.
.
.
자, 우리 일어나 일을 하자
어떤 운명이 닥쳐올지라도
기꺼이 이룩하고 추구하면서
수고하고 기다리는 것을 배우자.
-[롱펠로 시집] <인생찬가> 중에서-

그러나 롱펠로의 시에 감동하기엔 다소 불편한 구석도 없지 않다. 그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 때문이다. 1861년부터 1865년 사이는 미국에서 노예제 폐지를 두고 남부와 북부간의 내전이 벌어졌던 시기이다. 결국 롱펠로는 평생을 두고 노예제도의 참상을 목격해야만 했다. 이런 롱펠로가 인생을 예찬한 시인으로 칭송되는 것은 작가 정신에 의구심이 들게 한다. <어두운 늪에 숨은 노예>, <한 밤에 노래하는 노예> 등을 통해 노예에 대한 연민의 정을 내보이긴 했지만 당시 현실의 심각성을 고려한다면 그의 인생 예찬이 가슴에 와 닿기엔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사십이 다 되어 읽은 <에반젤린>의 슬픈 사랑 노래에서 10대의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두운 늪 속에
쫓기는 흑인이 엎드려 있다.
한밤의 막사에선 불이 보이고
이따금 들리는 말발굽 소리와
멀리 경찰견이 짓는 소리
.
.
.
그가 태어난 아침부터
오직 그에게만 내린 괴로운 운명
곡식을 도리깨질하듯
땅에 내동댕이치며
오직 그에게만 내린 카인의 저주여!
-[롱펠로 시집]  <어두운 늪에 숨은 노예> 중에서-

범우문고의 [롱펠로 시집]은 롱펠로의 많은 시들을 3부작으로 재구성했다. 1.인생찬가, 2.에반젤린, 3.마음의 가을. 특히 3.마음의 가을에서는 소네트를 감상할 수도 있다. 소네트(Sonnet)란 14행으로 된 서정시를 말한다. 롱펠로는 초서와 세익스피어, 키츠 등 대문호들을 소네트를 빌어 예찬하고 있다.

시인을 포함한 작가를 평가할 때 그가 시대정신을 대변했느냐가 전체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적극적으로 항거하는 것도, 보편적인 민중들의 삶을 노래하는 것도 시대정신이기 때문이다. 그 참혹한 현실에 부역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사춘기 시절 만났던 에반젤린. 꺼져가는 기억 속에 그대로 담아둘 걸 그랬다. 때로는 알아서 안좋을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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