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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1,000만 영화 [해운대]의 모티브가 됐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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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이란 모름지기 이런 것이다

수필·피천득 지음·범우사 펴냄

오래 전 가을 춘천 영랑호에 간 적이 있다. 영랑호가 목적은 아니었고 설악산 여행중 우연히 들렀는데 그 곳에서 머물렀던 짧은 시간이 긴 여운으로 남아있다. 붉게 이글거리던 가을놀을 빼앗은 영랑호는 나그네의 피로를 풀어주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누군가 좁쌀 만한 돌이라도 던져 파장을 일으켰다면 호되게 꾸짖어줄만큼 세상의 소음을 잔잔한 수면 속으로 빨아들이고 있었다. 피천득의 [수필]을 읽을 때면 그 때 영랑호 한 켠에서 바라봤던 해질녘 호수를 떠올리게 된다.

그의 말마따나 플롯이나 클라이맥스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게 수필이라서일까? 아니면 수필의 색깔이 황홀 찬란하거나 진하지 아니하기 때문일까? 아무튼 개인적으로 피천득의 [수필]은 문학 장르로서의 수필에 대한 편견을 깨주기에 충분했다. 또 수필은 청춘의 글이 아니요, 서른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라는 저자의 말에 미세하게 요동치는 심장의 울림이 느껴진다.

영화 [해운대]의 모티브가 되다

작년 1,000만 영화의 반열에 오른 [해운대]는 방송을 통해 충격적으로 봤던 2004년 동남아 쓰나미를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정작 감독은 피천득의 '인생이란 작은 인연과 오해를 풀기 위해 사는 것이다'라는 글귀가 영화 [해운대]의 모티브가 됐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영화 속 '금아횟집'도 피천득의 호에서 따왔다고 하니 그가 받았을 감동을 미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윤제균 감독은 스치는 사이라도 인연이 존재한다며 인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단다. 우리도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읽은 적이 있는 수필 '인연'의 이 부분이 윤제균 감독에게 영감을 주지 않았나 싶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수필], '인연'중에서-

비로소 영화 [해운대]에 설경구와 하지원, 엄정화와 박중훈, 이민기와 강예원의 다양하고 서로 다른 인연이 등장했는지 이해할 것 같다. 이민기와 강예원의 이룰 수 없는 사랑도 감독에게는 너무도 소중한 인연의 일부였을 것이다.

"피천득.jpg"


 

진정 생활의 발견이란 [수필]을 두고 한 말이다

이 글을 쓰기 전 소박한 독서가님의 블로그를 방문했는데 임어당의 [생활의 발견]이 추천도서로 소개되어 있었다. 대학시절 나름 방황하면서 즐겨읽었던 책이다. 책 제목만 본다면 피천득의 [수필]이 임어당의 글보다 더 어울리지 않나 생각해 본다. 소소한 일상, 그냥 의미없이 지나쳐 버린 일상들이 수필가 피천득에게는 문학의 소재가 된다.

"비원은 창덕궁의 일부로 임금들의 후원이었다. 그러나 실은 후세에 올 나를 위하여 설계되었던 것인가 한다. 광해군은 눈이 혼탁하여 푸른 나무들이 잘 보이지 않았을 것이요, 새소리도 귀담아 듣지 못하였을 것이다. 숙종같이 어진 임금은 늘 마음이 편치 않아 그 향기로운 풀 냄새를 인식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수필], '秘苑'중에서-

엄마의 애틋한 사랑도 일상에서의 경험을 통해 담백하게 표현해 낸다.

"엄마와 나는 구슬치기도 하였다. 그렇게 착하던 엄마도 구슬치기를 할 때에는 아주 떼쟁이었다. 그런데 내 구슬을 다 딴 뒤에는 그 구슬들을 내게 도로 주었다. 왜 그 구슬들을 내게 도로 주는지 나는 몰랐다." -[수필], '엄마'중에서-

그는 논개도 계월향도 멋진 여성이지만 황진이도 멋있는 여자라고 했다. 누구나 큰 것을 위해서 살 수 없다며 인생은 오히려 작은 것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늘 큰 것만 쫓는 우리에게는 스치듯 지나가는 일상들이 시시해 보일지도 모른다. 이도 아니라면 수필가 피천득이 소소한 일상을 금빛으로 그려내는 특별한 내공을 소유하고 있던지...

하늘에 별을 쳐다볼 때 내세가 있었으면 한다는 수필가 피천득, 왜? 신기한 것, 아름다운 것을 볼 때 살아 있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생각하기 위해서란다.

[수필]에 담긴 35편의 짧은 글들을 읽다보면 당신도 하늘을 쳐다보며 보잘 것 없었던 나를 둘러싼 소소한 일상들이 소중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살아있다는 고마움에 다시 한 번 밤하늘을 쳐다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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