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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시인의 마을

XX다움을 강요하는 사회, 정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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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움/오 은/창작과 비평 2013년 가을호

 

파란색과 친숙해져야 해/바퀴 달린 것을 좋아해야 해/씩씩하되 씩씩거리면 안돼/친구를 먼저 때리면 안돼/대신, 맞으면 두배로 갚아줘야 해

 

인사를 잘해야 해/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야 해/받아쓰기는 백점 맞아야 해/낯선 사람을 따라가면 안돼/밤에 혼자 있어도 울지 말아야 해/일기는 솔직하게 써야 해/대신, 집안 부끄러운 일은 쓰면 안돼/거짓말은 하면 안돼

 

꿈을 가져야 해/높고 멀되 아득하면 안돼/죽을 때까지 내 비밀을 지켜줘야 해/대신, 네 비밀도 하나 말해줘야 해

 

한국 팀을 응원해야 해/영어는 잘해야 해/사사건건 따지고 들면 안돼/필요할 때는 거짓말을 해도 돼/대신, 정말 필요할 때는 거짓말을 해야만 해/가족을 지켜야 해

 

학점을 잘 받아야 해/꿈을 잊으면 안돼/대신, 현실과 타협하는 법도 배워야 해/돈 되는 것을 예의 주시해야 해/돈 떨어지는 것과 동떨어져야 해

 

내 주변 사람들에겐 항상 친절해야 해/대신, 나만 사랑해야 해/나한테만 베풀어야 해

 

뭐든 잘해야 해/뭐든 잘하는 척을 해야 해/나를 과장해야 해/대신, 은은하게 드러내야 해/적당히 웃어넘기고 적당히 꾀어넘길 줄 알아야 해/눈치를 잘 살펴야 해/눈알을 잘 굴려야 해

 

다움은 닳는 법이 없었다/다음 날엔 다른 다움이 나타났다/꿈에서 멀어진 대신,/대신할 게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죽을때까지 지켜야 하는 비밀처럼

 

다움 안에는/내가 없었기 때문에/다음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오 은 시인의 '다움' 중에서-

 


 

'X세대'라고도 하고, '전교조 세대'라고도 했던 필자 또래의 중년들은 형님 세대나 동생 세대들과는 전혀 다른 학창 시절을 경험했다. 일제 강점기 시대의 잔재인 깜장 교복도, 신세대의 취향에 어느 정도 부합한 패션 교복도 입어보지 못했던 교복 자율화 세대가 소위 '낀 세대'로도 불리는 마흔살 전후의 성인들이다. 게다가 당시 교육 당국의 정책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두발 단속도 그리 심하지 않았다. 오랫만에 그 시절 졸업 앨범을 꺼내보면 저마다 천연색 복장에 맘껏 멋을 낸 헤어 스타일을 한 친구들의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나오기도 한다.

 

 

사진> 경향신문

 

그렇다고 복장과 두발을 전적으로 학생들의 자율로 내버려 두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늘 '학생다움'의 기준은 별반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학생다움'이란 바로 교복을 입어야 하고, 머리도 스포츠 스타일로 짧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교복을 부활해야 한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었고, 학교마다 두발에 관한 별도의 기준을 정해 그 무시무시했던 바리깡이 매일같이 교문을 지키고 있었으니 말이다. 결국 필자보다 몇 년 아래 동생들은 국가와 사회가 그토록 간절히 바래왔던 '학생다움'으로의 복귀가 현실화됐다. 영화나 TV 속 다른 나라의 학생들은 '학생답지' 못해서 힙합 바지에 치렁치렁 눈까지 가린 헤어 스타일로 교실에 앉아있다는 것인지. 따지고 보면 지구상에서 '학생다운'(?) 아이들은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몇 나라 되지 않을 것이다.

 

다움은 닳는 법이 없었다

다음 날엔 다른 다움이 나타났다

 

시인의 표현대로 우리는 끊임없이 '다움'을 신념처럼 강요당하며 살고 있다. 대학에 들어가 사회의 갖가지 모순에 눈을 떠도 '대학생 다움'은 강의실과 도서관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하는 것이다. 불의와 부정에 눈을 감아주는 것은 '다움'을 실천하기 위한 미덕이다. 국가와 사회가 강요하는 '다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결혼을 해도 '남편 다움'이 있고 '아내 다움'이 있다. '어른 다움'이 있고, '노인 다움'이 있다. 무형의 집단에 소속되는 순간 죽는 그 날까지 실체도 불분명한 'XX다움'을 강요받으며 살아간다.

 

즉 'XX다움'은 집단의 가치일 뿐 그 안에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몰인간, 몰개성이 'XX다움'의 본질인 것이다. 민주주의의 작동 원리로 다양성을 강조하지만 'XX다움'은 개인과 개인의 가치의 희생을 담보로 집단과 집단의 가치만을 강요하는 표현에 불과하다. 'XX다움'이 민주주의의 가치와 공존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집단의 보편적 가치가 합의되어야 하지만 늘 'XX다움'의 주체가 국가나 사회라는 점에서 통치와 규제의 도구로 활용될 수 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다움 안에는/내가 없었기 때문에/다음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혹자는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교학사 교과서에 대해서도 민주주의의 다양성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들만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역사도 있는 그대로 포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 '대한민국 다운', '한국인 다운' 가치로 내세운 자유 민주주의적 역사를 합리화하기 위해 과거 독재 정부는 물론이거니와 일제 시대마저 찬양하고 미화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시다시피 그들이 내세운 가장 '대한민국 다운' 가치가 이승만에서 박정희로 이어지는 근현대사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인지도 모른다. 더욱 더 참담하고 결코 민주주의의 다양성 범주에 포함시킬 수 없는 것은 그들의 가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진실을 왜곡하고 사실을 은폐한 흔적들이 교과서 전반에 걸쳐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양성과 표현의 자유가 그들이 주장하는 '대한민국 다운' 가치를 정당화하기 위한 진실 왜곡과 사실 은폐까지 허용한다는 것은 아니다.

 

마침 오늘이 한글날이어서인지 오늘자 조간 신문에 교학사 교과서가 '훈민정음'도 빠뜨렸다는 기사가 눈에 띄었다. 그들이 주장하는 '대한민국 다운' 역사가 무엇이길래 세계기록유산으로까지 등재된 찬란한 역사마저 홀대하다니 'XX다움'의 가장 나쁜 예를 보는 듯 하다.

 

'다음 안에는 내가 없었기 때문에 다음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는 시인의 말은 조직적으로 권위주의 시대로의 회귀를 획책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 울리고자하는 경종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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