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어회/이 순/1979년
박정희 전대통령이 서거하던 해 국민학교(초등학교)를 들어갔으니 그야말로 1980년대는 나에게 푸릇푸릇했던 학창시절의 추억을 오롯이 담고있는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어느 농가 굴뚝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보인다고 할 정도로 육지와는 멀리 떨어진 오지 섬에서의 기억은 되돌아보면 근대화의 흔적들로 가득 차 있다. 토요일 오전 수업이 끝나면 학교 운동장에 동네별로 모여 하교를 했고, 일요일 아침이면 '새마을' 깃발 아래 신작로 청소며 공동우물가 화단 가꾸기며 막힌 또랑에 물길내기를 했다. 더 멀리 기억을 더듬다보면 면에서 나온 무슨 단속반원들을 피해 술독을 이고 산으로산으로 향햐는 동네 어른들의 긴장된 표정까지....국민학교 들어가기 훨씬 전의 일까지 어렴풋이 기억나는 게 신기할 뿐이다.
이런 촌놈이 이런저런 이유로 국민학교 4학년 여름방학이 지나고 도시로 전학을 했으니 새 친구들에게 나는 아마 뭉툭한 돌도끼 들고있는 구석기인처럼 비쳤을 것이다. 그래도 어영부영 4학년은 마쳤으나 5학년이 시작되면서 나는 '내가 진짜 구석기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말았다. 일명 '가정환경실태조사'(정확한 제목은 가물가물~~)라는 걸 당하고부터다. 게다가 남몰래 적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닌 손들기였으니 비록 촌놈이었지만 우등생이라는 자존심은 유리조각처럼 산산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 흔한 전화기도 없었고 냉장고도 없었고 TV라곤 미닫이문이 달린 흑백이었으니 말이다. 우리집은 서민이라는 고상한(?) 단어보다는 하류층이라는 계급적 표현이 더 정확했다.
"나는
시집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여기 하류층 시집을 중산층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불철주야 동분서주하는 새내기 며느리가 있다. 친정 동생이 '시집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언니'라며 비아냥 거렸지만 결혼 몇 년만에 일층이 봉제공장인 방 세칸짜리 미니 이층집에서 방이 다섯 개에다 제법 연못도 파여 있는 뜨락 달린 슬래브집으로 이사했으니 그녀의 결혼생활은 제법 성공한 듯 보인다. 그러나 바람잘 날 없는 게 또 시집살이라 하지 않았던가.
"난 한 남자를 선택해서 결혼한 거구,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한다는 건 공동 이익 체제를 구성하게 되었다는 걸 뜻하는 거야. 그 공동 이익에 남편의 부모형제들의 복지가 포함되는 게 뭐가 이상하니? 너는 남편 형제들의 학벌이 자신에게 무관하다고 생각하니? 내 아이들의 삼촌들이 될 텐데?" -<병어회> 중에서-
가족을 위해 이 한 몸 바칠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 그것도 며느리가. 페미니스트들이 보면 계도의 대상일테고 굳이 페미니스트가 아니더라도 가족의 신분상승이 물질적 풍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이 며느리의 신념은 일견 천박하고 세속적으로 비춰지기에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어회>의 저자 이 순은 병어회 만찬을 하며 가족들의 신분상승에 대한 굳건한 의지를 바라보는 며느리의 흐뭇한 웃음으로 소설을 마무리한다. 저자가 이런 고리타분한 결말로 소설의 대미를 장식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주인공 '나'는 비루한 대가족의 며느리다. 대가족의 며느리이기 전에 어느 평범한 중산층의 어여쁜 딸이기도 하다. 그녀에게 사랑의 댓가는 실로 버티기 힘들만치 무거운 짐들뿐이다. 무능력한 시아버지, 이런 남편을 가장으로 충실히 떠받드는 시어머니, 이뿐인가! 세 명의 시동생에, 세 명의 시누이까지. 게다가 시할머니까지 있으니 층층시하란 이런 시집을 두고 한 말일게다. 대학원과 유학까지 포기하면서 선택한 사랑. 그녀에게는 시집 식구들 뒤치닥꺼리 말고도 꿈이 있었다. 보다 큰 집으로 이사하는 것. 그것은 중산층으로의 신분상승을 의미했다.
이런 대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이 부부에게 맞벌이는 필수. 그녀는 친정 여동생이 버린 옷까지 가져다 입으며 중학교 영어교사 말고도 과외수업까지 하는 억척 며느리다. 곱디곱게만 자란 그녀가 이런 하류층 집안의 시잡살이를 버틴 데는 사랑도 사랑이지만 신분상승을 향한 남편과의 공감대를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뭐야? 하라는 공부는 않구 연애를 해?"
"뭐 하는 여자래? 학생이래?"
"그 녀석도 하나하나 갖추어가는군."
"갖추다니요? 뭘 갖춰요?"
"뭐긴, 중산층의 조건이지. 전에 당신이 그랬지? 중산층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딸을 대학에 보내는 거라구 말야. 그런 집 딸을 데려오면 중산층이 되는 게 아닌가? 아니지, 금방 되는 건 아니지. 하지만 그리고 가는 길임은 틀림없는 거지." -<병어회> 중에서-
이런 남편이, 시집살이 몇 년만에 내집 장만의 꿈을 이루고 이제 영어교사와 과외수업을 그만두어도 되지싶은 그녀에게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들려온다. 남편이 회사를 그만둔 것이다. 게다가 남편은 이 기회에 대학원을 갈까 생각중이란다. 여편네 학교 선생 하는 것만 믿겠다는 수작으로 생각하고 있는 그녀의 선택은? 이 쯤에서 그녀가 자기 정체성을 찾아 이혼 이야기라고 꺼낼지 모른다는 상상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이 소설의 반전이라면 반전이다.
저자가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남성중심의 가족주의를 수용한 이유
이 싱거운 반전의 매개체가 바로 제목의 '병어회'다. 지금은 대형화되고 고급화되어 그 참맛을 느끼기란 여간 어려운 경험이 아닐 수 없지만 소싯적 허름한 포장마차의 주인과 손님의 경계를 구분지어주는 것은 다름아닌 각종 생선과 야채가 그득한 수제 냉장고였다. 그 냉장고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었던 안주가 바로 병어. 비스듬히 썰어놓은 병어회 한 접시면 술맛은 그야말로 꿀맛이었으니 입 안에서 사르르 녹아드는 그 맛은 두고두고 뇌리를 비껴가지 못한다. 지금이야 흔하지 않은 생선이지만 1970,80년대만 해도 포장마차의 주메뉴였으니 대표적인 서민 생선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중산층에서 하류층 가정으로 시집온 그녀가 가장 자주 보는 병어회는 그녀로 하여금 신분상승의 욕망을 자극하는 소재임에 틀림없다.
중류로 한창 올라가고 있는 판에 막노동이라니 무슨 해괴한 소리냐는 것이 대문을 거칠게 밀고 나가는 시동생의 등판에 씌여진 글자였다. 그러나 나로선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보다 큰 집과 냉장고와 전화를 장만한 것이었다. 병어같이 싼 생선만 먹을 것도 없었다. 광어쯤 먹어도 이젠 좋을 것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뜨락의 그네였다. 아니, 그 그네를 탈 아이였다. -<병어회> 중에서-
한편 병어회는 남성중심사회에서 가장, 아버지의 존재감과 위상을 확인시켜주는 상징적 소재다. 병어회는 그녀의 시집에서 경사스런 날이면 시아버지가 손수 장만하는 음식이다. 고깃배를 하다 지금은 망하고 몇날 며칠 소식이 두절된 채 바깥으로 도는 시아버지이지만 어시장에서 병어를 사오는 일부터 회를 뜨는 일까지 시아버지의 솜씨가 없으면 먹을 수 없는 게 바로 병어회다. 곧 병어회는 아버지 중심의 가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소재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저자는 왜 시대의 흐름에 역행한다는 비판이 일 수도 있는 남성중심의 가족주의를 옹호하려는 듯 해피엔딩으로 소설을 마무리했을까. 그것은 바로 시대적 상황에 대한 비판의식이 깔려있다고 볼 수 있다. 오랜 근대화 과정의 병폐로 가족의 해체를 꼽는 데 주저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저자는 남성중심적 가족주의를 해학적으로 비판하기도 한다.
시어머니 말대로 하면 하늘에 매인 대로 아들딸 도합 일곱을 낳아 그 중 하나에게 나머지 다섯을 앵겨버린 셈이었던 시어머니와 그의 남편이 뻔뻔스럽게 느껴져서이다. -<병어회> 중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가족만이 근대화가 남긴 병폐를 씻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게다가 남편의 실직에도 불구하고 이 가족에게 물질적 풍요와 거기에 따른 중산층으로의 신분상승은 무능력하지만 그 중심에 남성이 있어야 한다는 뿌리깊은 가족주의의 관습을 그대로 수용하고 만다. 이 소설의 한계임에도 불구하고 가족의 해체가 결코 근대화의 결과물이 아닌 현대사회의 또 다른 왜곡된 자화상이라는 점에서 소극적 여성상에 대해 오로지 비판만 가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천박스럽다고 비난할지도 모를 물질적 신분상승의 꿈을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솔직하게 드러내 보인 저자의 글쓰기 또한 인상적이다. 비록 천박할지언정 비루한 서민들의 현실적인 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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