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포 가는 길/황석영/1973

 

마당 앞에는 실개천이 흐르고 온갖 채소들로 가득한 뒤뜰을 나지막한 산이 내려다보고 아이의 눈과 같은 높이로 서있는 언덕배기에는 누렁 송아지와 강아지가 한가로이 술래잡기 하는 곳반나절에 한 번 오는 버스를 기다리는 주름진 노인의 얼굴에는 미소가 흐르고 굽이굽이 힘든 줄 모르게 고개를 넘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해가 내려앉은 곳. 질흙 같은 어둠 속에서도 이야기가 새어 나오는 곳. 누군가에게는 빛바랜 사진 속 풍경일 수도 있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마음 속에 고이고이 담아둔 꿈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천박스럽다고 하지만 로또 한 장에 일주일이 희망인 서민들의 꿈은 소박하다. 아니 고달픈 시간이 길어질수록 서민들의 꿈은 얕아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바야흐로 선거의 계절이 다가오고 대통령을 꿈꾸는 선량(選良)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서민들의 꿈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한 여름밤의 달콤한 꿈은 개표방송이 끝남과 동시에 밀려온 포말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반복되는 역사라는 것을 알지만 기댈 곳 없는 서민들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시간이기도 하다.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가 당시 현실을 반추했던 거울이었듯 이 시대 서민들의 꿈에도 강한 저항의식이 저변에 깔려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 을씨년스런 겨울길을 걷는 두 남자, 그리고 두 남자와 동행하는 한 여자. 이들의 가슴 속에는 저마다 다른 풍경의 삼포가 자라고 있다. 그들만의 이상향이지만 어디에도 없는 곳은 아니다. 그저 어디에도 있는 곳을 벗어나고픈 소박한 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량한 겨울길은 이들의 꿈이 녹녹하지 않을 거라는 암시라도 주는 듯 하다. 황석영의 소설 <삼포 가는 길>은 저마다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서민들의 이야기다. 단어의 무게에 비해 그다지 거창하지도 않는 이들의 이상향은 어떤 모습일까.

 

노래로도 유명한 삼포는 남쪽 끝 경상도 어느 해안에 자리잡은 작은 포구라고 한다. 그러나 황석영의 소설에서 삼포는 가상의 공간이다. 소설 속에서는 비록 정씨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지만 저자에게 삼포는 당시 고달픈 서민들의 이상향으로 그려진 가공의 지명인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그려내는 서민들이 이상향 삼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넉 달 있었소. 그런데 노형은 어디루 가쇼?”

삼포에 갈까 하오.”

방향 잘못 잡았수. 거긴 벽지나 다름없잖소. 이런 겨울철에.”

내 고향이오.”

 

앞서도 언급했듯이 삼포는 소설 속 주인공 정씨의 고향에 불과하다. 그러나 고향으로써 삼포가 당시 도시 서민들이 꿈꾸는 이상향으로써의 삼포가 된 데는 소설의 시대적 배경 때문일 것이다. 근대화와 산업화의 바람이 휘몰아친 1970년대, 원조라는 명분으로 쏟아진 미국의 잉여농산물은 해방 후 농지개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비루한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농민들에게는 이중의 고통이었다. 산업화는 이런 농민들의 탈출구였다. 도시로 도시로 몰려든 농민들은 도심 외곽에 도시 서민이라는 새로운 계급을 형성하게 된다. 문제는 개발독재라는 권위주의 정부가 주도한 산업화의 온기가 특정계층에 집중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농민들은 도시 서민으로 다시 도시 서민은 도시 빈민의 양산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하게 된다. 

 

 

그렇다면 고달픈 서민들의 이상형으로 그려진 삼포의 풍경이 어머니의 품이 있는 소박한 고향이라는 것은 보다 자명해진다. 개발의 때가 묻지 않은 곳, 상대적 빈곤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곳, 풍족하지는 않지만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곳, 즉 당시 도시 서민들의 마음의 안식처가 바로 삼포인 것이다. 이상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초라해 보이지만 당시에도 그랬듯이 오늘 대한민국을 살고 있는 서민들에게도 더욱 절박하게 다가오는 꿈이지 싶다. 그들은 그렇게 삼포를 향해 겨울길을, 밤길을 쉼없이 걷고 있다.

 

그래서 소설에서 길과 동행은 특별한 상징성이 있다. 소설 <삼포 가는 길>을 영화로 만들면 로드무비쯤이 되지 않을까 싶다. 때로는 휘몰아치는 눈바람을 견뎌내야 하고 때로는 밤길을 방황하기도 하고 때로는 개울을 건너야 하고 때로는 낯선 갈림길에서 선택을 강요 받아야만 하는 인생의 길 위에서 동행은 서로에게 위안이자 힘이다. 공사장을 전전하는 뜨내기 노동자 영달과 교도소에 갔다가 그곳에서 배운 기술(?)로 영달과 비슷한 생활을 하는 정씨, 군부대 근처의 술집 작부로 일하던 백화는 근대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삶의 근거지를 잃어버렸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편 이들은 당시 산업화와 근대화를 일군 우리네 아버지요, 어머니요, 형이요, 누나인 것이다. 비록 산업화의 언저리로 밀려났지만.

 

저자는 이들의 동행을 통해 각자의 이상향 못지않게 소외된 사람들끼리의 동료의식과 연대의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은연 중에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근근이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이들에게 사랑이 사치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동료의식과 연대는 사랑을 씨앗으로 할 수 밖에 없다. 아무리 비루한 인생들이지만 역사의 빈 공간을 채우는 것도 바로 이들인 것이다. 각자의 이상향을 향해 떠나는 기차역에서 백화는 비로소 자신의 본명이 이점례라는 사실은 영달에게 고백한다. 한편 이들이 길 위에서 바라본 풍경에는 당시 농촌의 현실이 상징적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들은 이 적막한 산골 마을을 지나갔다. 눈 덮인 들판 위로 물오리떼가 내려앉았다가는날아오르곤 했다. 길가에 퇴락한 초가 한 간이 보였다. 지붕의 한쪽은 허물어져 입을 벌렸고 토담도 반쯤 무너졌다. 누군가가 살다가 먼 곳으로 떠나간 폐가임이 분명했다.

 

이 폐가에 살았던 이들이 바로 영달과 정씨와 백화가 아니었을까. 어쨌든 정씨와 또 동행하기로 한 영달의 삼포는 기차역에서 만난 삼포를 안다는 어느 노인의 말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말두 말우, 거긴 지금 육지야. 바다에 방둑을 쌓아놓구, 추럭이 수십 대씩 돌을 실어 나른다구.”

낸들 아나. 뭐 관광호텔을 여러 채 짓는담서, 복잡하기가 말할 수 없데.”

바다 위로 신작로가 났는데, 나룻배는 뭐에 쓰오. 허허, 사람이 많아지니 변고지. 사람이 많아지면 하늘을 잊는 법이거든.”

 

기차가 도착했지만 영 마음이 내키지 않는 정씨. 마음의 안식처를 잃어버린 허전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곧 이상형이 사라져버린 현실. 노인의 등장은 냉정한 현실을 일깨우기 위한 소설적 장치다. 저자가 당시 현실을 바라보는 냉정한 시선이자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처럼 현실을 반추해내는 거울로써 삼포를 등장시켰던 것이다. 어딘가에 있을 삼포를 향한 이들의 동행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문학적 저항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신문에서 만든 또 하나의 삼포가 소설 속 1970년대 서민들의 비루한 삶이 21세기인 오늘에도 끝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로 삼포(三抛)세대라는 신조어다.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포기한 세대라는 의미의 삼포세대. 이 우울한 말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소설 속 여운이 너무 길게 느껴지는 오늘이다.

 

Posted by 여강여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