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그곳에는 타락한 동심 쑈리가 있었다

반응형

송병수의 <쑈리 킴>/1957년

어린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모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전혀 아이답지 않은 어린 출연자들의 말과 행동에 깜짝 깜짝 놀라곤 한다.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속담 퀴즈를 척척 알아맞춘다. 영어도 곧잘 한다. 아빠의 고단한 생활을 얘기하면서 눈물까지 흘린다. 그 아이들 틈 속에서 속담의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장황하게 정답을 설명하는 한 아이는 마치 외계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천진난만함이 되레 이상하게 비쳐진다.

부모의 아이를 배려하지 않는 눈높이와 대리만족이라도 느낄것처럼 쏟아내는 부모의 욕심은 순수하고 순진해야 할 아이들을 애어른으로 만들어버리는 세상이다. 여기 또 한 명의 애어른이 있다. 극히 순화된 표현을 빌려서 애어른이지 실은 어른들의 어두운 그림자를 흉내내는 타락한 동심이다. 이 아이가 사는 그곳은 21세기 부모의 욕망이 지배하는 사회도 아니고 무한대의 경쟁에 내몰려 순수한 동심에 상처를 받는 사회도 아니다. 도대체 그곳의 풍경이 어떠하길래 아이로써 누려야 할 권리인 동심마저 배부른 사치로 만들어 버렸을까.

작가 송병수의 데뷔작이기도 한 <쑈리 킴>은 '쑈리'라 불리는 한 아이의 기행과 눈을 통해 전쟁의 가장 비극적 현장과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그러나 여전히 미해결로 남아있는 모순의 단면을 실감나게 고발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던 그곳은 지방의 한 미군부대이고 또 그곳은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는 1950년대 한국사회의 축소판이다. 주인공 "쑈리'는 열 살 남짓의 전쟁고아로 양공주에게 미군을 소개하면서 하루하루 삶을 꾸려나가고 있다. 저자는 굳이 어른들의 말을 빌리지 않고도 타락한 동심을 통해 전쟁의 비열함과 상흔을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쑈리가 '심부름꾼'의 속어이든 '키작은(shorty)'의 영어식 발음이든 중요하지 않다. 그저 미군들에 의해 '쑈리'로 불리고 있을 뿐이다. 전후소설로 분류하긴 했지만 소설 어디에도 전쟁의 흔적들은 없다. 다만 쑈리가 꿈속에서 본 아버지와 엄마의 죽음을 통해 쑈리가 전쟁고아임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알록달록한 꽃밭인지, 파란 잔디밭인지?……그런 곳에서 따링 누나하고 '저 산 너머 해님'을 신나게 부르는 꿈을 또 꾸었다. 예쁜 동무들도 같이 불렀다. 빨갱이가 쳐들어왔을 때 다락에 숨어 있다가 잡혀간 아버지도 있었고 아기 젖 먹이다가 폭격에 무너진 대들보에 깔려 죽은 엄마의 얼굴도 꼭 거기서 본 것 같은데……눈을 떠보니 땅구덩이다. -<쑈리 킴> 중에서-

그렇다. 쑈리는 미군부대 막사 근처 땅구덩이에서 양공주인 따링 누나와 함께 살고 있다. 수도 없이 등장하는 이해하기 힘든 영어 단어들은 소설의 현장감을 배가시켜주기도 하지만 멀쩡한 독립국가 영토에 주둔하고 있는 미국의 저급한 문화를 상징하기도 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언어뿐만이 아니다. 쑈리와 또 한 명의 전쟁고아인 딱부리가 미군들과 서슴없이 담배를 나눠피기도 하고 심지어는 미군들에 의한 아동 성추행까지 사실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전쟁으로 훼손된 동심은 성매매에 혈안이 된 미군을 흉내내는 딱부리의 행동에서 극단으로 치닫는다.

"씨이, 비싸게 굴지 마아. 나도 돈은 얼마라도 낼 테야."
하며 고추만한 그것을 내밀고 대드는 것이었다. 그러는 놈을 따링 누나가
"이 앙큼한 놈,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자식이 무슨 짓이냐."고 귀빰을 올려붙인다. 그러자 자식은
"이 똥갈보년이 누굴 함부로 치느냐." -<쑈리 킴> 중에서-

환경의 영향 즉 전쟁으로 세상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이들에게 진정 희망은 없는 것일까? 동심을 회복하지 않는 한 이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는 결코 순탄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저자는 이들의 비참한 삶 속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본다. 비록 미군들에게 몸을 팔고 있지만 쑈리에게 따뜻한 인간애를 느끼는 따링과 미군의 라디오 속에서 흘러나오는 '저 산 너머 해님'이라는 동요를 목청껏 부르는 쑈리의 모습이 그것이다. 결국 이들은 미군부대를 떠나게 된다.

그저 따링 누나를  만나 왈칵 끌어안고 실컷, 실컷 울어나 보고, 다음에 아무 데고 가서 오래 자리 잡고 '저 산 너머 해님'을 부르며 마음 놓고 살아봤으면……-<쑈리 킴> 중에서-

소설은 전쟁의 참상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미군부대를 배회하며 타락해 가는 전쟁고아와 미군들을 상대로 몸을 팔며 전전하는 여성을 통해 전쟁의 비극과 주한미군의 문제를 동시에 비판하는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아이가 아이답지 않은 사회를 결코 정상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1950년대 미군부대 주변에서 어른의 흉내를 내며 살아가는 쑈리가 그랬고 21세기 무한경쟁에 내몰린 아이들이 또 그렇다. 철없이 행동하고 철없이 말하는 게 순수한 동심의 본질일 것이다. 애어른을 강요하고 어른을 흉내내야만 하는 아이들이 많은 사회는 어딘가 뒤틀린 구석이 많다는 의미가 아닐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