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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그가 죽음을 선택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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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원의 <유예>/1955년

앙리 뒤낭(Jean-Hemri Dunant, 1828~1910)은 1858년 이탈리아 통일전쟁 당시 제분회사의 수리권을 얻기 위해 나폴레옹3세를 만나러 가던 중 솔페리노 전투에서 수천명의 부상병이 신음하는 참혹한 현장을 보게된다. 이 때 경험을 바탕으로 앙리 뒤낭은 국적에 구애됨없는 전쟁 부상자 구호를 위한 중립적 국제민간기구의 창설을 역설하게 되는데 이 기구가 바로 국제적십자사다.

그러나 전쟁의 특성상 국적을 떠나 전시에 부상당한 군인과 민간인에 대한 보호는 말뿐인 구호에 그치게 된다. 1949년 제네바 회의에서 체결된 '제네바 협약'은 전쟁 중 부상당한 군인이나 민간인뿐만 아니라 전쟁 포로에 대한 인권을 명시한 국제협약이다. '제네바 협약'에는 전지(戰地)
에 있는 군대의 부상자 및 병자의 상태개선에 관한조약>, <해상에 있는 군대의 부상자, 병자 및 난선자의 상태개선에 관한 조약>, <포로의 대우에 관한 조약>, <전시의 민간인 보호에 관한 조약>등 4개 조약으로 구성되어 아무리 적이라 할지라도 종교나 인종, 국적을 떠나 인간으로서 보호받을 권리를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이라크 전쟁에서도 보았듯이 전쟁은 결코 최소한의 인간적 권리마저 묵살시켜 버리는 재앙이요, 괴물이다.

오상원의 소설 <유예>에서도 국제협약과 상관없이 전쟁 승자의 일방적 판단에 의해 포로를 처리하는 장면이 그려지고 있다. 대표적인 전후작가로 알려진 저자가 <유예>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는 분명하다. 전쟁의 참혹성과 전쟁으로 말미암은 비인간성을 고발하고 있다. 제목 그대로 <유예>는 주인공인 수색대 소대장이 적진에 뛰어들어 포로가 된 뒤 총살이 결정되는 한 시간 동안 겪게 되는 의식의 흐름을 관찰자적 입장에서 보여주고 있다.

영화적 기법으로 구현해낸 의식의 흐름

<유예>의 가장 큰 특징은 의식의 흐름이다. 처음과 끝에 죽음을 직전에 둔 주인공의 내면의식을 배치하고 소설 중간에는 포로가 되는 과정을 현재와 과거의 의식을 오버랩시키면서 전개하고 있다. 특히 저자가 연극과 영화에 관심이 있었던 탓인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박태원의 <천변풍경>에서 보듯 소설 속 이야기를 몇 개로 나누어 배치하지만 독자들은 서로 다른 에피소드가 하나의 영상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또 죽음을 목전에 둔 주인공의 내면 의식은 저자 자신의 일체의 감정이 배제된 채 주인공의 심리만을 표현하는 문체로 서술되고 있다. 짧은 문장은 극적 긴장감을 더해준다. 다만 눈이라는 배경을 통해 전쟁의 비정함을 극대화시키고 있을 뿐이다. 

그들이 정신을 잃고 쓰러졌을 때는 이미 새벽이 가까워서였다. 산속의 아침은 아름답다. 눈 속에 덮인 산속의 새벽은 더욱 그렇다. 나뭇가지마다 소복이 쌓인 눈이 햇빛에 반짝인다. ... 얼음장처럼 밑이 차다. ... 몹시 춥다. ...-<유예> 중에서-

한편 소설은 1인칭과 3인칭 시점을 넘나들면서 주인공의 내면의식과 저자의 주제의식을 동시에 표현해내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가 죽음을 선택한 이유

전쟁의 비정함은 일체의 인간성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쟁이 만들어낸 현실은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세계일 뿐이다. 개인의 감정과 선택은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 이분법으로 재단된 세계 속에서 개인은 기계의 부속품처럼 움직일 뿐 인간의 본질은 말살되고 만다. 주인공이 목격한 어느 국군포로의 최후 진술은 이런 전쟁으로 파괴된 인간성의 실체를 여실히 보여준다.

"생명체와 도구와는 다른 것이오. 내 이상 더 무엇을 말하고 싶겠소? 나는 포로가 되었을 때 비로소 내가 확실히 호흡하고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았을 뿐이오. 나는 기쁘오. 내가 한 개의 기계나 도구가 아니었다는 것, 하나의 생명체인 인간으로서 살아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인간으로서 죽어간다는 것, 그것이 한없이 기쁠 뿐입니다." -<유예> 중에서-

주인공이 죽음을 선택한 이유는 그가 공산주의에 반대해서가 아니다. 그가 목격했던 국군포로처럼 인간으로서 살아있음을 체감하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일 것이다. 이와 동시에 저자는 주인공이 죽음을 선택하는 설정에서 전쟁의 몰가치성을 부각시키려 했음이 분명해 보인다. 

누가 죽었건 지나가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모두 평범한 일인 것이다. 의식이 점점 그로부터 어두워갔다. 흰 눈 위다. 햇빛이 따스히 눈 위에 부서진다. -<유예> 중에서-

앞서 언급한 '제네바 협약' 중 세번째인 <포로의 대우에 관한 조약>은 포로에 대한 인간적인 대우와 적절한 음식과 구호품 제공, 고문 금지 등의 조항을 담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전쟁이 이런 최소한의 선의라도 갖고 있었다면 애초에 '전쟁'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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