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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북 리뷰

결코 유쾌할 수 없는 희극, 베니스의 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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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세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1596년

햄릿, 리어왕, 오셀로, 멕베스. 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세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 문학의 주인공이자 희곡 제목이기도 하다. 일명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으로 꼽히며 세익스피어 문학의 최고 걸작들이라고 할 수 있다. 세익스피어는 비극적 운명을 맞이하는 주인공들을 통해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잠재해 있는 다양한 심리를 통찰해 보려고 시도했다. 비극이라는 주제를 통해 인간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시도했던 세익스피어는 당시 유행하던 희극에 식상해 하는 대중들의 심리를 제대로 꿰뚫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세익스피어가 비극에만 몰두했던 것은 아니다. 

세익스피어는 살아 생전에 전체 37편의 희곡을 남겼다. 그 중에는 많은 희극들도 존재하는데 후세 사람들은  4대 비극과 대비시켜 4대 희극이니, 5대 희극이니 하는 말로 그의 문학적 성과를 평가하기도 한다. 4대 비극이 무겁고 음침한 분위기를 연출했다면 그의 희극들은 유쾌하고 발랄한 연출을 통해 삶에서 겪게 되는 다양한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나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 중에서도 <베니스의 상인>은 세익스피어 희극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 시대 지중해 중개무역의 중심지였던 베니스(베네치아의 영어식 표현)에 모인 다양한 민족들간에 벌어지는 갈등을 재치있는 상상력으로 풀어내는 작품이다.

솔로몬의 지혜

<베니스의 상인>을 관통하는 주제어라고 한다면 사랑과 우정이다. 그 중심에 있는 인물은 유대인 악덕 고리대금업자인 샤일록과 친구와의 우정을 위해 목숨까지 마다하지 않는 베니스의 상인 안토니오다. 여기에 끈끈한 우정의 상대로 바사니오가 있다. 바사니오는 벨몬트의 뷰유한 집안의 딸인 포셔의 연인이다. 한편 비정한 인물로 묘사되는 샤일록과 달리 그의 딸인 제시카는 상냥한 성품으로 안토니오의 친구인 로렌조와 사랑에 빠져 아버지를 배신하는 낭만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과연 이들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사건의 발단은 바사니오가 포셔에게 청혼하기 위해 친구인 안토니오에게 돈을 빌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안토니오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배를 담보로 샤일록에게 돈을 빌리게 된다. 그런데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안토니오와 샤일록은 기이한 차용증서를 쓰면서 위기를 자초한다. 안토니오가 기한 내에 돈을 갚지 못할 경우 자기의 가슴살 1파운드를 베어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적물을 싣고 항해중이던  배가 난파됨으로써 안토니오는 샤일록에게 진 빚을 갚지 못할 처지에 이르고 만다. 이 때 바사니오는 연인 포셔의 도움으로 안토니오의 빚을 갚으려 하지만 샤일록이 거부한다. 샤일록은 평소 자신을 비난하던 안토니오에게 복수할 기회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법정에 선 안토니오. 그는 비정한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에게 자신의 가슴살을 떼어주고 말 것인가.

한 아이를 두고 서로 자신의 자식이라고 주장한 두 여인에게 명쾌한 판결을 내린 솔로몬의 지혜를 연상시키는 포셔의 재치로 안토니오는 위기에서 벗어나게 된다. 남자 법학 박사로 변장한 포셔는 위기의 순간에 차용증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포셔는 안토니오의 가슴살을 베어낼 준비를 하고 있는 샤일록에게 정확히 가슴살 1파운드만 베어내야 하며 단 한방울의 피도 흘려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차용증서에는 가슴살 1파운드만 베어내겠다는 것만 명시돼 있을 뿐 피를 흘려도 된다는 말은 없다는 것이다. 결국 포셔의 재치로 재판에서 진 샤일록은 그의 전 재산을 압수당하게 된다. 두 친구의 우정과 그 우정을 지켜주려는 한 여인의 사랑이 만들어낸 최고의 판결이었던 셈이다. 

결코 웃을 수 없는 불편한 진실

재판에서 진 샤일록은 두 가지를 명령받게 된다. 하나는 베니스의 법률에 따라 전 재산을 빼앗기게 된다. 

포셔 베니스 법률이 정하는 바는 아래와 같소.(법조문을 읽는다) 만일 외국인이 직접 또는 간적으로 베니스 시민의 생명을 노렸다는 사실이 판명될 경우 가해자 재산의 절반은 생명을 빼앗길 뻔한 피해자에게 돌아가도록 되어 있고 나머지 절반은 국고에 귀속되도록 되어 있소. -<베니스의 상인> 중에서-

또 기독교로의 개종을 강요받는다. 피해자인 안토니오는 자비라는 명목으로 친구 로렌조를 돕기 위한 꼼수를 부린 것이다. 

안토니오 ...물론 전제 조건이 두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이 같은 은혜를 입었으니 유대인은 그 보답으로 당장에 기독교로 개종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여기 이 법정에서 재산 양도증서를 작성하는 일입니다. 즉 임종시 유산 전부를 사위 로렌조와 딸 제시카에게 물려준다는 양도증서를 지금 이 법정에서 쓰는 일입니다. -<베니스의 상인> 중에서-

이 재치발랄하고 유쾌한 희극의 이면에는 인종차별과 종교적 우월주의가 내포되어 있다. <베니스의 상인>이 쓰여진 16세기 당시 영국인들에게는 반유대 감정이 성행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종교적 갈등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스와 로마 시대부터 이민족이었던 유대인들은 우상숭배를 거부했고 자연스럽게 황제에 대한 숭배를 거부해서 깊은 갈등의 골을 만들어왔다. 게다가 기독교인들에게 유대인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원수와 같은 존재였다. 세익스피어는 악덕 고리대금업자인 샤일록이라는 인물을 창조해서 반유대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던 것이다. 또 기독교가 가장 자비로운 종교라는 점을 내세우기 위해 벌금형을 감해 주는 대신 기독교로 개종하는 샤일록을 통해 종교적 우월성을 강조하려 했던 것이다.

이후 도래하는 제국주의 시대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신대륙과 구대륙을 넘나들며 현지의 토착종교와 문화를 말살하는 엄청난 학살이 자행되었다. 이런 인종과 종교 우월주의는 20세기의 시작을 피로 얼룩지게 하고 말았다. 바로 히틀러의 출현이다. 게다가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절대강자 미국을 등에 업은 유대인들의 이슬람 민족 탄압이라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있다. 

세익스피어의 희극 <베니스의 상인>이 결코 유쾌할 수 없는 불편한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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